어쩌다 서른여섯에 암환자가 되어버렸다.
사실 조직검사를 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작은 확률이라도 확실히 하기 위한 의사의 지나친 권유(흔히들 과잉진료라고 말하는.. 그런 것?)라고 생각했다. 검사 일주일 후 결과를 들으러 가서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직접 맞닥뜨리기 전까지도 난 정말 근거 없는 긍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암이라고 이야기하며 나의 시선을 회피하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을 보는 순간, 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났다.
드라마나 영화에서처럼 하늘이 무너지고 억장이 무너지고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통곡할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더라. 다만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이 나를 계속 가득 채우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울음보는 엄마와 통화를 하면서 터져 나왔다. 하다 하다 내가 암에 걸려 엄마의 속을 썩일 줄이야... 정말 인생 어떻게 될 줄 모른다더니 그게 내 이야기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머님... 어떡하면 좋아요..." 하며 언제나 듬직했는데 갑자기 어린애처럼 서럽게 꺼이꺼이 우는 남편과 눈물만 주르륵 흘리는 나를 달래느라 우리 엄마는 우리 앞에서 울지도 못하시고 참으셨던 것 같다. 우리 부부가 우니까 다섯 살짜리 딸도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울었다. 따라 우는 딸아이를 보니 내가 혹시 잘못되면 저 어린것은 어찌 살아갈까 하는 생각(세상 모든 아픈 엄마들의 공통된 생각이겠지)에 더 많이 울었다.
이틀 밤낮을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하는 생각과 왜 하필이면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파노라마처럼 지난 인생을 반추해봐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건강이 나쁜 편도 아니고, 술도 못 먹고, 남들한테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고, 안 듣고 나름 잘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억울하기도 했다. 출근할 때 입으려고 심혈을 기울여 주문한 원피스 택배가 도착한 것을 보고 당장 내가 죽게 생겼는데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서 박스를 바닥에 내팽겨버렸다(물론 지금은 아주 잘 입고 있음).
다행스럽게도 운이 좋아서 바로 다음 날 서울 아산병원에서 진료를 하게 되었다. 새벽 첫 차를 타고 남편과 함께 병원을 찾았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비 내리는 창 밖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매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맞이하던 풍경이었는데 '죽음'을 구체적으로 그려보게 되던 순간이어서 그랬을까... 나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무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풍경을 보면서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여보, 나 지금 꿈꾸는 것 같아." 하면서 괜스레 눈물을 참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그냥 막 서러웠다.
'암이지만 암은 아니다'라는 의사의 앞뒤 안 맞는 모순된 표현이 무너져가던 나의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었다. 다행히 나는 0기, 제자리암이라 항암, 전이 없이 수술만으로 완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진료를 기다리면서 본 수많은 환자들(아마 대부분 암이거나 중병이었을 듯)을 보며 위안 아닌 위안을 얻었다. 환자복을 입고 항암치료 때문에 빠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쓴 환자들을 볼 때마다 '그래도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야(환자분들껜 죄송하다)'하는 생각으로 힘을 냈다.
너무도 생경했던 수술실 풍경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TV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은 다른 수술대와 각종 장비들, 그리고 의료진들이. 그리고 수술 대기실도 잊을 수 없다. 그곳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에 열중하던 백발의 할머니와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기침을 심하게 하시던 아저씨, 그리고 작게 틀어놓은 차분한 클래식(아마도 수술대기자들의 심신안정을 위한 것이었겠지)을 들으며 멍 때리며 순서를 기다리는 내가 있었다.
2017년 4월에 암 진단을 받고 벌써 2021년이 되었다. 이젠 1년에 한 번만 지방에서 서울로 정기검진을 받으러 올라간다. 가기 전에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 졸이다가 환자 취급 안 해주는 의사 선생님을 뵙고 안심하고 병원을 나온다. 여전히 그 병원엔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환자들이 그득하고, 나는 '괜찮다'는 의사 선생님의 그 말 한마디를 들으러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다. 너무 애쓰지 말자.. 욕심내지 말자.. 건강하게 살자.. 가 내 모토가 되었다. 마음가짐도 자꾸 고쳐먹는다. 걱정이 끊이질 않고 작은 일에도 계속 신경 쓰던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 중이다.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면 걱정 그만 하자', '될 대로 되라지',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려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예전처럼 애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생각해보면 (나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저 위에 있는 위대하신 누군가가 '야! 너 그렇게 살면 큰일 나! 그렇게 살지 마'라고 나에게 일침을 날린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난 그 위대하신 누군가의 경고를 받아들여 이젠 맘 편히 나만 생각하며 조금은 이기적인 삶을 살기로 했다. 다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행복하게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살아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