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할 때는 늘 걱정이 앞선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그려보고 대비책을 세운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혹시 몰라 현지 지인 연락처를 포스트잇에 적어 넣고, 외투 속 주머니에는 비상용 카드를 하나 숨겨 둔다. 떠나는 순간까지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걱정이 사라진다. 나에게는 보통 여행의 3분의 2쯤 지났을 때다. 김영하 작가는 이를 ‘낯선 곳에 받아들여질 때의 기쁨’이라고 말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이 말을 듣고 나서 여행을 해보니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알겠다.
일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있다. 너무 큰 일을 맡으면 마음이 짓눌리고, 시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씩 손을 대다 보면 두려움이 서서히 밀려나고, 어디선가 빛이 비쳐 들어오는 시점이 온다. 나의 경우 일도 대략 3분의 2쯤 윤곽이 잡히면 ‘해낼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든다.
글쓰기 역시 다르지 않다. 자료를 모을 때는 ‘이걸 언제 정리해서 책으로 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그런데 생각을 정리하고 문장을 쌓다 보면, 어느 순간 ‘아, 이 정도면 해볼만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책은 한 번밖에 써보지 않아 그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헤밍웨이가 말한 것처럼 ‘쓰레기 같은 초안’을 끝냈을 때가 아닐까.
시골 어머님들은 ‘눈은 겁이 많고 손은 겁이 없다’고 하신다. 넓은 밭을 바라보면 한숨부터 나지만, 막상 잡초를 뽑기 시작하면 어느새 끝이 보인다는 것이다. 시골 어르신들은 이미 알고 계신 거다. 두렵고 막막하고 자신이 없어 보일 때, 답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매고 떠나라. 잡초를 뽑아라. 일을 시작하라. 글을 써라. 두려움이 앞설수록,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가라.
이걸 아는데 40년 넘게 걸렸다.
한심한 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