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장면도 아닌 날

보이지 않는 감독

by 하진
movie-scenes-3757174_1280.jpg ⓒ Pixabay

새벽이면 골목 끝에서 짧은 연기가 펼쳐진다. 배우가 존재하지 않는 카메라를 향해 대사를 흘려보내면, 상인들은 가판대를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춘다. 별 이름 없는 배우였음에도 그는 누구보다 먼저, 향수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대사를 잘 알았다.


배우란 현실에서 꿈의 잔광을 더듬어 연기하는 존재였다. 가난한 배우가 연기를 멈출 수 없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증발하지 않는 기억의 파편이었고, 밤마다 세계가 무너져도 마지막까지 손끝에 남아 붙잡을 수 있는 실오라기였다.


부유한 상인은 종종 그 골목을 지나갔다. 본래 그의 세계에는 극장도, 문학도, 예술도 없다. 오직 계산서의 줄무늬와 숫자의 숨결만이 그의 하루를 채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배우의 장면만큼은 자신의 세계 바깥에서 어렴풋이 들어오는 빛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서로 전혀 다른 방향을 걷는 두 사람이었지만, 어떤 보이지 않는 교차점에서 둘은 날마다 스쳐 지나갔다. 배우의 연기가 시작되면, 상인은 설명할 수 없는 잔향 하나가 귓가를 건드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전 잃어버린 음색이 먼 곳에서 되돌아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듯했다.


공연을 감상하는 상인의 앞에서 배우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흘러도 연기는 멈추지 않았다. 돈이 필요했지만, 딱히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이 무심히 지나쳐도, 한 장면만큼은 남겨두려는 어떤 미세한 의지였다.


그렇게 하루는 굴러갔다. 꿈과 현실이 닿았다가 꺾이는 순간마다, 그는 잠시나마 자신이 존재한다는 느낌을 되찾았으니까. 꿈과 현실이 스치며 찢어지는 틈마다, 배우는 잠시나마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새벽, 세계에 미세한 균열이 생겼다.


카메라도, 조명도, 감독도 사라진 듯 보이는 골목은 이상할 만큼 고요했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단지 멈춰 선 채 미세하게 떨리는 듯했다. 그때 배우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물었다. “감독이 사라진다면, 내 연기는 누가 기억해 주는가?” 상인에게도 비슷한 의문이 스쳤다.


“감독 없이도 그는 정말 배우인가? 아니면 나는 그저, 남의 꿈을 돈을 주고 구경하던 바보였던가?” 순간 골목은 숨을 들이마신 듯 정적에 잠겼다. 어쩌면 세계는 감독 없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비워둔 자리에서 비로소 새 장면이 태어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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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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