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또 달리기
- 불행-행복이 부재하는 시간
1
달리기를 했다. 마라톤 하프 코스(21.0975km)를 뛰려 했는데 준비 부족으로 얼마 남겨놓지 않고 19.26km에서 중단하고 말았다.
오늘 달린 것은 '추석 연휴'를 알차고 건강하게 보내야 한다는 마음의 각오이자 운동 습관을 정착시키고자 한 각고의 노력, 그것이었다.
달리기는 우리들 누구나 어렸을 적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반드시 누워 있다가 몸을 뒤집고, 배로 바닥을 딛고 사지로 허우적 거리고, 네 발로 기어다니고, 일어선다.
일어서다가 주저앉기를 부지기수, 짱짱하게 떡 서고, 한 발작 한 발작 한 발 두 발 걷는다. 다리에 힘이 생겨 드디어 마음대로 걸을 수 있을 때 어린 아이의 이동 수단은 숫제 걷기보다는 달리기이다.
매사에 염려 투성이인 오직 어른들만 "넘어진다, 뛰지 마라."를 거푸거푸 말하며 말리지 어린 아이는 (라떼는) 아빠에게 거실 저쪽에 있는 담배를 가져다줄 때도 잇따라 라이터를 스스로 가져다줄 때도 노상 달려다닌다.
크면서 도롱테를 만들어 밀고 동네를 몇 바퀴씩 돌기도 하고, 하릴없이 달라기 시합도 했던 것은 라떼 정도의 옛 얘기가 되고 말았지만 지금도 초등학교 중학교 학생까지에게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은 아니다.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와야지만 안심할 수 있는 등의 여러 사회적 현실은 걷기와 뛰기를 평범한 인간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만다.
2
달라기가 인간에게 원초적 직접성과 치열성을 요구하는 정도는 최상위이다. 달리기는 또한 엄격하고 정확하다. 달리기는 냉정하고 가혹하기조차 하다. 무엇보다도 달리기의 압권은 무미와 폭소라고는 1도 없는 건조, 그리고 무의미이다.
달리기는 인간에게 가장 성실할 것을 바란다. 가장 인간적일 것을 요구하고 가장 인간이기를 명령한다. 장애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최소 필요한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달리기가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몸 뿐이다.
근대적 경주를 해야 하는 일부 선수를 빼면 달리기 하기 위해 선생님이나 코우치가 필요치 않고, 달리기 학교를 다닐 필요도 달리기 학원을 다닐 필요도 고액 과외를 받을 필요도 없다. 조물주와 부모님이 주신 몸으로 제량껏 맘대로 뛸 만큼만 뛰면 된다.
뛰다가 걷다가 뛰어도, 쉬었다가 뛰어도, 한 숨 자고 뛰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도 않는다. 뛰고 싶은 시간에 뛰고 싶은 곳에서 뛰고 싶은 만큼 뛰면 된다. 달라기를 하면 차가 갈 수 없는 곳, 자전거가 갈 수 없는 곳 그 어디까지나 갈 수도 있다.
3.
안타깝게도 달리기는 요즘 생활의 한 부분이기보다는 운동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한 것이 되버렸다. 이제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사람이 어느 목적지에 당도하기 위하여 달리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다.
달리기는 여타의 많은 스포츠처럼 기술이나 기교를 요구하지 않는다. 운이 따라주었다, 또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하는 경우와도 관계가 없다. 선수들의 경주가 아니라면 성적과 순위도 필요가 없다. 달리기를 하는 데에는 몸둥이와 성실함과 끈기의 단순함이 필요충분 조건일 뿐이다.
그 어떤 요행이나 기만, 기적 같은 의외성을 용납하지 않는 달리기는 두 발을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단 1미터도 나아가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뛰지 않으면 그 궤적은 그려지지 않는다.
달리기의 매력과 유혹과 중독성은 그 단순함과 무의미성에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여 100미터 쯤 달리면 몸의 어떤 부분에서 첫 신호가 온다. 1킬로, 2킬로, 3킬로, 4킬로, 5킬로... 주로 하체를 중심으로 각종 통증이 잠깐씩 들렀다 가고, 7,8킬로 쯤 달리면 몸이 서서히 편안해지기 시작한다.
10킬로 내외 쯤 되면 온 몸은 가지런히 정돈되고 머리 속에서는 그 어떤 복잡한 생각들도 희미해지며 단순해진다.
매양 분주하고 어지럽게 헝클어진 - 그로 인해 마음 아프고 괴로운 - 삶의 의미들이 머리 속을 빠져 나가고 몸과 마음이 오직 반복의 단순함과 무의미로 충만해질 때..., 머리속은 행복감과 불행감이 동시에 부재하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몸은 순항하는 배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간다.
마라토너들은 여기 구간을 runner's high라 하는 모양이다.
나의 경우는 16킬로 쯤 뛰면 이제 순전히 달리기로 인해 누적된 부담이 시작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제 몸이 over working을 하여가는 것이다.
이렇게 2차적으로 몸이 힘들어지는 구간에 진입하면 이제 처음 시작할 때 목표로 했던 거리에 기준하여 딱 그만큼 뛸지, 조금 더 뛸지, 아니면 덜 뛰어 어느만큼에서 멈출까 진짜로 결정해야 한다.
마무리할 마음을 갖고 포구에 배가 정박하러 들어가듯이 유유히 끝낼 지점을 향해 뛴다. 여유 있는 마음을 유지하려 한다.
달리기를 마치면서 꼭 자기 몸과 마음에 감사하고 스스로를 격려한다. 씻을 때는 차분히 앉아서 발을 잘 닦아드린다.
마지막 한 마디 붙이자면 뛰기 시작해서 마지막 종점을 찍을 때까지 중간에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냥 2킬로, 4킬로, 6,8,10,12,14, 16킬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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