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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AZURE POET Oct 07. 2024

료화 이야기

료화 이야기

      - 고려 이규보의 시 료화백로에서 차재(借材)하여

 

옷장

옷장을 정리하다 보면 어떤 옷은 하던 일을 멈추게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누고

위와 아래, 겉과 속, 남길 것과 버릴 것, 아까워 누구라도 주고 싶은 것

머리는 빠르게 분류하고 손은 따라가며 움직여

밀린 숙제 같은 옷정리를 하루는 넘기지 말아야지 서두르는 동안에도

바닦에 펼쳐놓고 생각이 생각을 끌고가는 걸 놔둬야 하는 옷이 있다

 

책장

책장을 정리할 때도 손을 멎게 하고 마음을 주저앉게 하는 책이 있다

우두커니 서서 아득하고 먼 시간을 망연히 바라보다 가까이 당겨지고, 그리로 가지면

그때가 현실이고 지금이 비현실인 것 같아서 자실하게 하는 책이 있다

밑줄이 그어진 곳을 읽으며 천천히 책장을 넘기고, 결국 마주친 표지 뒤에 숨겨진

  - 19++년, 가을 너무 깊다. 료화

숨을 멎게 하고, 행간에서 방망이질 하는 소리가 나는 책이 있다

 

사진첩

사진첩에도 여느 사진들과 다를 것 없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지만

가만히 끼어 있는 어떤 오래된 사진 한 장의 무게는 다른 모든 사진을 얹은 사진첩보다도 무겁다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생각하고 설레고, 걸어오고 뛰어가고, 나란히

초롱한 눈과 단정한 입과 덥수룩 멋낸 머리칼과 금목서 향내 나는 머리칼이 섞인 사진 한 장,

오른쪽 가장자리를 잡고 왼쪽으로 넘기면

마법에 걸렸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의 문이 열릴 것 같아 차마 손바닥으로 꼭 눌러준다

 

옛시

책장 앞을 서성이다 시집 머리를 하나씩 짚어가는 시간, 손가락을 멎게 하고 시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어느 반촌 마을 앞 물고기와 새우가 많은 여울과 백로들이 돌아와 앉는 여뀌꽃 언덕*

료화, 시간을 저어가는 여행자와 너무 가녀리고 너무 붉어 애처로운 과부 같은 너는

서시의 언덕에 앉아 물이 자꾸 차가워져가는 가을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너는 너의 시간 밖으로 나오고, 나는 나의 시간 밖으로 나가, 천 년 밖 풍경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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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蓼花白鷺(요화백로)

                        이 규 보

前灘富魚蝦(전탄부어하)

앞 여울에 물고기와 새우가 많아

有意劈波入(유의벽파입)

물살을 깨 발을 넣고 앉았네

見人忽驚起(견인홀경기)

사람 기척에 놀라 솟구쳐 올라

蓼岸還飛集(요안환비집)

여뀌 언덕에 다시 날아와 앉네

........................

<전반부, 김민휴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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