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아주 먼 곳 여행을 하다
풀죽
김 민 휴
날씨가 좋은데 낮 한 시가 될 때까지 집 안에 갇혀 딱히 생산적인 일도 못하고 봄날 한나절을 보내고 있다. 오늘은 아직 안이비설신 모든 감각기관이 아름다운 봄날과 접촉을 못했다. 아예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도 궁금증도 호기심도 근질근질함도 없어져버렸다. 마치 스톡홀름 신드롬에 빠진 것처럼 방꼭의 편안함에 익숙해져 버린 것같다. 권태로운 시간의 시내를 떠내려가는 자아의 종이배를 머리속에 떠올려 애써 심미적 위안을 찾으려 하는 정도의 능력만이 허락된 하루가 이렇게 반절 흘러갔다.
그 시간이 왔기 때문인지, 호수같이 넓은 내 배의 어느 한 귀퉁이에서로부터 희미한 신호의 허기가 왔기 때문인지, 문득 머릿속에 흑백 장면 하나가 다가온다. 그것은 어린날 내고향 바닷가 마을에서 아침 일찍 방파제에 나가 동네 아낙들과 함께 서 있을 때, 밤새 바다에 떠서 고기잡이를 하고 귀항하기 위하여 안개속에서 처음엔 소리로, 그리고 희미하게, 점점 선명하게 다가오는 어선들 같이 내 의식의 가운데로 다가온다.
엄마는 벌써 한 달 남짓 농사일을 하는 틈틈이 한 가지 작업을 하고 있다. 한 날 면소재지 오일장에서 누리끼리한 당목천 몇 필을 끊어 오시더니 연신 빨아서 뜨거운 염천 햇빛에 널어 말리고, 또 빨아서 내다 말리고를 반복하는 것이다. 몇 번을 반복하는 사이 처음에 누르스름하고 질감이 거칠게 보였던 천이 바래어 차츰차츰 희고 피부도 매끈하게 보인다.
드디어 이제 당목천들은 새하얗게 되었다. 이제 때도 늦여름, 또는 초가을로 접어들어 날씨는 더욱 쾌청하고 하늘은 더 파래져 높아지고, 햇빛들은 자기들끼리 피부를 부벼 까잘까잘 밝고 가볍고 명랑한 소리를 낸다. 오늘은 엄마가 누나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부산해지셨다. 나도 덩달아 터무니없이 좀 들뜨게 된다.
우리집 다섯 칸 기와집 마루는 언제나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다. 명절이면 동네 청년들이 배구대회를 하곤 하는 마당은 지푸라기 한 올 없이 잘 빗질되어 있다. 오늘은 그 마루 가운데에 꽤 양이 많은 하얀 당목천이 쌓여 있다. 그리고 아까부터 부엌에서는 가마솥에서는 흰 쌀 끓는 냄새가 수증기와 함께 피어올라 우리집 뒤란으로, 앞마당으로, 감나무 밭으로, 닭장 쪽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오늘은 당목천을 바래는 마지막 작업으로 쌀죽을 쑤어 이깨어 풀을 만들어 흰 당목천에 먹여 좋은 햇빛과 바람에 널어 말리는 날인 것이다. 커다란 통에 풀물을 담고 천을 적셔 빨래줄에 널어놓는다. 그러면 처음엔 수분 때문에 축 처져 있지만 점점 마르면서 천은 빧빧하고 까잘까잘해지게 되는데 이 때 초가을 바람이 제 갈 길을 가다 우리집 마당을 들러 지나가면 마르고 있는 천들이 부딪혀 소리를 내는데 차르르 차르르 팔랑팔랑, 그 소리는 딴 데 세상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좋은 소리이다.
그런데 나는 전혀 엉뚱한 이유로 이 날들을 좋아했다. 물론 내 유년시절을 통털어서 이런 날은 서너 번 밖에 없었던 것같다. 나는 엄마를 졸라 이 풀을 하기 위해 쓴 쌀죽 얻어 먹기를 하는 것이다. 이 맨쌀죽은 아무것도 첨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무맛인데 내가 먹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조선간장을 좀 친달지 아니면 무잎김치를 얹어서 먹는 일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 무맛, 맨맛의 쌀죽을 무척 좋아했다. 이 쌀죽을 먹을 때 나는 꼭 맑은 찬물을 부어 숟가락으로 저어 식혀 먹곤 했는데, 이 쌀밥 알들은 더욱 하얗고 깨끗하게 보인다. 그리고 물속에 있는 밥알들을 숟가락 가득 담아 입속에 넣으면 미끄러운 느낌 없이 깔끔하고 아무 맛 없는 말 그대로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엄마가 담은 그 맛있게 익은 무 잎 김치를 깨물어 먹으면 행복의 물이 입 안 가득 고이고 입 안을 한 바퀴 돌아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집에는 엄마와 누나들이 있고, 아버지와 형들은 들에 나가 있다. 혹은 큰 도시로 나가 학교에 다니는 형, 누나도 있다. 풀을 먹여 빨래줄에 널어놓은 천들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땅거미가 동네에 깔린 뒤에도 얼마 동안 그대로 놔두어져 저녁 이슬을 맞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저녁밥을 지을 때 누나는 짚불을 때지 않고 솔잎과 소나무 가지 불을 땔 것이다. 엄마와 누나들은 화로에 숯불을 가득 담아 그 속에 인두를 넣어 달굴 것이다. 그리고 재래식 손다리미에 벌건 숯불을 담아 흰 장목천을 다림질 하여 보관할 것이다.
오늘 점심은 그 풀죽을 쑤어 먹었다. 나는 부엌에 나가 쌀 한 컵을 씻어 물에 불려놓는다. 맑은 몹쌀이 물에 불어 하얗게 찹쌀처럼 되었을 때 불에 올리고 부지런히 숟가락으로 저어준다. 풀죽이 완성되자 큰 대접에 덜어 담고 찬물을 부어젖는다.
이 맛없고 싱겁고 심심한 풀죽을 그 어떤 음식보다 맛있게 먹었다. 먹는 동안 내 유년의 가족들이 함께 해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형들, 누나들, 그리고 단 한 뼘도 내 몸 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는 아름답고 따뜻한 나의 옛집이 나를 감싸주었다. 봄날에는 늘 어김없이 뒤란에 함박꽃이 피었던 나의 옛집, 추억의 봄날이 간다. 봄날이 간다.
2016.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