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해한 낭비, 유효한 삶

by 바달



이젠 덮어두고 외면해도 좋을 것들을 왜 나는 자꾸만 꺼내어 보는 걸까.


2025년이 저물어간다. 올 한 해 나는 두 번의 이별을 겪었다.


하늘이 시리고 눈이 내리던 3월 말, 15년을 함께한 강아지가 하얀 구름이 되어 떠났다.


애완동물 장례식장 로비에 앉아, 화장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어릴 적 강아지의 발랄한 발걸음 형태로 멀리 달려가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손바닥만 한 털북숭이를 처음 집으로 데려온 순간부터 마음 한편에 두려워했던 순간이었다. 15년을 준비했음에도 느닷없이 몰아친 상실의 폭풍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 후 몇 달간, 꿈속에서 자꾸만 아파하는 강아지를 만났다. 신음하며 고통받는 이 생명체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글을 썼던 지난날을 후회했다.


죽음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나의 비좁은 품으로 안아보겠다며 써 내려간 문장들이 못내 부끄러웠다. 세상에 태어나 결국 사라져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불쌍해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그 슬픔 또한 사랑이라 믿으며 애도의 시간을 버텼다.


보슬보슬한 위로로 찾아와 준 아이에게 '불쌍함' 대신 '고마움'을 남기려 노력했다. 그저 예뻐할 수 있는 생명이 있어 견딜 수 있었던 인생의 제1막이 막을 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나는 낯선 공간이 아닌 친정집에 있었다. 현관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파란 운동화가 놓여 있었고, 강아지는 그것을 물어 들고 신나게 집 안을 뛰어다녔다.


장난감을 더 가져와 던져주다가 그것이 꿈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옆구리를 파고들던 숨결과 코 고는 소리, 자그마한 발자국. 그 모든 감각이 실재했음을 기억하며 처음으로 다시 감사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꿈속에서 반복되던 강아지의 죽음이 이제야 비로소 마무리에 닿았음을.



강아지가 세상을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소설을 처음 마무리 지어 공모전에 제출했던 날이었다. 낙방 이후 줄곧 묻어두었던 기록을 다시 펼쳐보기로 했다. 이별 앞에서 나를 준비시켜주지는 못했을지언정, 그 시간들이 그저 헛된 일로 끝나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아줄을 붙잡았다.


글을 쓰는 일은 자꾸만 과거에 매몰되려는 나를 강제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그 여정의 끝에 또 하나의 이별이 찾아왔다.


외할아버지의 소천 소식이었다. 머리 위를 받치던 두 겹의 우산 중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삶은 이별의 연속이며, 그것을 감당해 내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임을 삶이 나를 떠밀며 가르치고 있었다. 기질부터 성격까지 당신을 꼭 닮은 나였기에,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며 이번만큼은 무너지지 않는 '어른'이 되기로 다짐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와 주고받았던 문자와 편지들을 다시 펼쳐 보았다. 할아버지의 국문학적 필력은 물려받지 못했어도, 무언가 써야만 하는 본능만은 고스란히 내 안에 남았음을 발견하며 조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어른스러웠던 나는, 문득 이 모든 죽음과 이별에 대한 고찰을 멈추고 싶어졌다. 아이처럼 생각에 매몰되는 대신 머리를 비우고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위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내고자, 글 쓰는 일을 이제 그만 놓아주려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남편을 시험장에 데려다주고 카페에 앉아 공부하던 어느 날, 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시기하듯 부러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평생을 무사히 살아내고 자식들을 길러낸 뒤 편안히 마침표를 찍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부러웠던 것이다.


그 연세가 되기까지 할아버지가 겪었을 고생은 건너뛴 채, 마무리된 결과만을 탐내는 고약한 심보였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이야기를 끝까지 살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살아있음을 오직 '책임'으로만 여기는 마음은 숨이 턱 막혔다.


왜였을까. 삶이 '유효'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효(有效), 보람이나 효과가 있다는 말. 무언가 성취해야만 삶이 의미 있다는 가치관은 때로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나는 또다시 유효하고 싶었다.


‘유효한 삶’이라는 말을 손에 움켜쥐기가 겁이 나 괜스레 이리저리 뒤집어보다가, ‘무해(無害)하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무해한 삶’. 살아있는 동안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은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은 결코 작은 꿈이 아니었다.


이어 '삶', 즉 ‘살아있음’의 반대말을 떠올렸다. 내게 그것은 '낭비'였다. 시간을 죽이고 삶을 잘라먹는 낭비. 하지만 ‘유효함’이라는 불가침의 영역을 다시 건드리는 판국에, 이참에 나 스스로에게 조금의 낭비 역시 허락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어쩌면 글을 쓰려 애쓰는 이 모든 행위도 낭비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낭비가 나를 ‘유효하게’ 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유효한 낭비'가 아닐까.


그 말이 마음에는 들었으나, 과하게 대조되는 두 단어 사이에서 온전한 안정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낭비’마저 ‘유효’ 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들었다.


아까 떠올렸던 '무해하다'를 대신 붙여보았다. 세상에는 유해한 낭비도 있지만, 명상하고 기도하며 글을 쓰는 '무해한 낭비'도 분명 존재한다.


삶의 모든 순간이 유효할 수는 없다. 나는 앞으로도 사소한 낭비들로 하루를 채우겠지만, 그 낭비들이 부디 무해한 것들이기를 바란다.


그런 무해한 낭비들을 모으다 보면, 내 삶도 언젠가 어떤 의미에서는 유효한 삶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카페에 앉아 <무해한 낭비, 유효한 삶>이라는 브런치북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리움’이라는 단어 또한 뒤집었다.



그리워할 것이 많은 삶을 나는 ‘행복한 삶’이라 부르기로 했다.


나는 이 삶을

무해한 낭비로 채워가며,

유효한 그리움들을 쌓으며,

살아가야겠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