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박완서 작가의 책이 정말로 좋아진 건, 아니 이해되기 시작한 건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였다. 고등학교 때 분명 읽었던 책인데도, 다시 펼쳐 든 문장들은 생경하리만큼 새로웠다
읽는 이의 계절에 따라 매번 다른 빛깔로 읽히는 글, 그 깊고 다채로운 결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이 글은 소설 속 문장을 빌려 유영하는, 내 생각의 파편들이다.
그러나 나는 미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내 속에 감추어진 삶의 기쁨에의 끈질긴 집념을 알고 있다.
주인공의 독하고 이기적인 면이 좋았다.
이것저것 다 살피느라 정작 중요한 건 놓치고 다니는 헤픈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 난
요즘 들어 시야가 좁고 독한 사람들이 싫지 않다.
도망하지 않기로 했어요. 내 나라와 내 집에서 내 문제를 피하지 않고 열심히 감당해 보겠어요. 그렇게 사는 게 옳겠죠?
나라가 뭐길래.
조국을 끊어내는 일은
가족을 끊어내는 일과 마찬가지로
현실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임을 종종 깨닫는다.
아아, 전쟁은 분명 미친 것들이 창안해 낸 미친 짓 중에서도 으뜸가는 미친 짓이다.
그렇다.
그 미친 짓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또렷이 말했으나 이내 섬뜩했다. 내가 그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써보긴 이번이 처음인데 그 말이 내 귀에 하도 공소하게 들려서였다. 역시 사랑이란 말은 하도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느라 옥희도 씨를 향한 내 지극한 열망을 담기에는 너무도 닳아 있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워낙 도처에서 추앙받는 탓에,
그 거대한 무게를 감당할 만큼 특별해 보이다가도
오히려 그 비대함 때문에
정작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할 때가 있다.
입 밖으로 내는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공허했던 건
실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랑이 너무 컸기 때문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사랑, 지극한 열망,
때론 단어에 담길 수 없어 대신 책 한 권 분량의 글이 필요한 감정이 있다.
그러고는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곧이어 살고 싶다로 고쳤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수 없다
죽고 싶으면 온전히 죽고 싶고
살고 싶으면 온전히 살고 싶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은 동시에 살고 싶은
그 공존이 인간에게 허락된 일임을 깨닫는 것이
왜 이리도 큰 충격이었는지.
나는 망가진 나를 상상하는 게 조금도 두렵거나 측은하지 않았다. 내가 망가진 대도 그것은 내 탓이 아니니까. 나는 망가지는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내 탓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중요하고 그 사실을 누구에게나 외쳐주고 싶었다.
나는 왜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나를 망가뜨리고 싶어 했을까.
눈에 띄게 상처를 내고 나면
그 상처를 들이대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탓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얼마만큼 육체가 참담해지면 그 앳된 나이에 그 영혼이 그 육체를 떠나지 않을 수 없나
고귀한 살아 있음이,
너무나도 끈질긴 그 살아 있음이,
언제든 참담해질 수 있는 육체 안에 담겨 있고
그래서 끝끝내 참담해진 육체는
더 이상 살아 있음을 담고 있지 않은데도
남은 이들에게는
살아 있음마저도 참담하게 여기게끔 한다.
아무리 쏟아져도 다할 날이 없을 것같이 풍성하던 황금빛 의상도 점점 희박해갔다. 나는 두터운 융단 위에 누워, 성깃한 노란 잎 사이로 푸른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런 시간이 좋았다. 무엇보다도 살아 있다는 것이 조금도 거리낌 없어 좋았다
살아 있음이 거리낌 없는 것.
우린 다 그걸 찾아 헤매고 있지 않나.
성공하면, 사랑받으면,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지면,
그땐 살아 있음이 거리낌 없을 거라는 착각으로
우린 헤매고 있지 않나.
살아 있음의 자격을 갈구하는 짐승은
인간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뿌리를 상실한 채 무성한 모순만을 넘겨받아, 그 모순이 나를 찢게 내맡기고 있었다
아, 무성한 모순
그냥 그 말이 너무 좋았다.
뿌리를 상실한 무성한 모순...
그녀는 아주 천진하고 맑게 웃었다. 어쩜 그녀는 가난을 저리도 궁상맞지 않게 다스리는 것일까?
예술가를 남편으로 두고
필연적으로 어깨에 짊어진 가난을
궁상맞지 않게 다스리는 아내.
옥희도 씨는 그런 그녀를 두고
경아에게 눈을 돌린 후에야
기어코 나목을 그려낸 것이다.
저 융단 위에 뒹굴기에는 나는 너무 늙은 것일까? 아니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을 거 느린 것일까?
젊어서 하던 미친 짓들이 그리울 때는 힘들게 먹은 나이가 군더더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더 많은 군더더기를 거느리게 된 나는
지금 이 순간 또한 미친 짓이나 하던 젊은 때로 기억하겠지.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내가 그 나목 곁을 잠깐 스쳐간 여인이었을 뿐임을, 부질없이 피곤한 심신을 달랠 녹음을 기대하며 그 옆을 서성댄 철없는 여인이었을 뿐임을 깨닫는다.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읽으면서는
허탈한 아쉬움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닐성 싶어서
경아가 자신이 별안간 '스쳐 지나간 사람'일 뿐이었음을 깨달을 때
마음껏 망연해하지도 못했고
현실은 뒤로 한 채
홀로 고고히 나목(裸木)으로 서 있었다는 옥희도 씨를 온전히 동경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단 한 번뿐인 인생에서,
현실에 당장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을 마음껏 동경해 보고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을 마음껏 망연해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내게도 그럴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미 낙엽을 끝낸 분수가의 어린 나무들이 벌거숭이 몸을 애처롭게 떨며 서로의 가지를 비빈다. 그러나 그뿐, 어린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못한 채 바람이 간 후에도 마냥 떨고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죽고 싶은 동시에 살아 있고 싶은 마음을
허락받은 뒤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전쟁은 분명 민족의 아픔인데,
그 아픔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서로 맞닿을 수 없는 개개인이다.
경아는 오빠들의 목숨을 앗아간 폭격이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남았음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나무는 같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고목(古木)이 아닌 나목(裸木)으로 자라났음을 바람결에 전해 듣는 것은,
묵직한 위로.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묵직한 위로.
우리를 의연하게 하는 것은
봄에의 믿음.
회복의 여지.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불현듯 다가오는
막연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경아. 경아는 나로부터 놓여나야 돼. 경아는 나를 사랑한 게 아냐. 나를 통해 아버지와 오빠를 환상하고 있었던 것뿐이야. 이제 그 환상으로부터 자유로워져 봐 응?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용감한 고아가 돼봐. 경아라면 할 수 있어. 자기가 혼자라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용감히 혼자가 되는 거야.
혼자라는 사실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
용감한 고아가 되고 나면
되려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흔들리는 수많은 나무들을,
고목이 아닌 나목으로 선 나무들을,
그 가능성을 붙잡은 사람들을,
용감히 사랑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