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아노 명곡집'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중 슈베르트의 '군대 행진곡'도 매우 유명하지요. 곡 제목 아래 '연탄곡'이라고 쓰여있던 이 곡은 말 그대로 두 사람이 한 대의 피아노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작곡된 곡입니다. 해서 피아노 학원 가는 것이 지루해질 때쯤, 선생님이 학생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자주 사용한 치트키 같은 곡이기도 했지요. 오늘은 어릴 적 추억을 소환해볼 겸 피아노 이중주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합니다.
피아노 듀엣(Duet)과 듀오(Duo), 무엇이 다른가요?
얼핏 보면 비슷한 뜻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의미는 많이 다릅니다. Duet 은 한 음악 안에 성부가 두 개로 나뉘어 있다는 뜻으로 피아노 이중주에서는 1 piano 4 hands, 즉 한 대의 피아노에 두 사람이 윗 성부와 아랫 성부를 나누어 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Duo는 역할이 다른 두 사람이 각자의 몫을 하는 'someone'의 의미를 지니므로 2 piano 4 hands, 두 대의 피아노에 각자 앉아 만들어내는 음악을 합친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 듀엣 : 1 piano 4 hands의 흥미로운 사실들
한 대의 피아노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연주하는 피아노 듀엣은 앉았을 때 위치를 기준으로 주로 윗 성부(first)가 오른쪽, 그리고 아랫 성부(2nd)가 왼쪽에 자리합니다. 그렇다면 이 위치를 누가, 어떻게 선정할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연주하려는 작품과 피아니스트 개인의 음색이 얼마나 잘 맞는지에 따라 위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피아니스트 팀이 혼성일 때, 여성이 윗 성부를 주로 맡게 됩니다. 관객석에서 봤을 때 여성이 아랫 성부를 맡아 왼쪽에 위치할 경우, 남성 피아니스트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레이디 퍼스트' 문화가 익숙한 유럽의 오랜 정서 때문으로 여겨지는데요, 유럽의 공연장에서는 무대 인사 역시 여성 아티스트가 먼저 입, 퇴장을 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피아노 듀엣 작품을 연주하며 가장 어려운 점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페달링'일 것입니다.
페달은 오른발로만 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왼쪽에 위치한 아랫 성부, 즉 2nd 파트 연주자가 단독으로 컨트롤하게 됩니다. 만약 페달을 밟는 아랫 성부 연주자가 페달링에 예민하지 못하다면 윗 성부 파트의 멜로디가 중간에 뚝뚝 끊어지게 되겠지요. 관객석에서 보면 윗 성부 연주자가 더 돋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아랫 성부 연주자의 역할이 훨씬 중요한 셈입니다. 본인의 연주에 충실함과 동시에 파트너의 플레이에 예민한 귀와 열린 마음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만큼 원숙한 피아니스트가 아랫 성부를 맡을 때 결과가 더 좋은 것만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최초의 피아노 듀엣 작품은 모차르트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연주 여행을 다닐 때 항상 누나 난네를이 동행하며 연습한 영향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의 나이 17살에 작곡한 '네 개의 손을 위한 소나타 K. 381'을 들어보면 어린 모차르트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이후 슈베르트가 그 영향을 받아 '군대 행진곡'과 에스테르하지에 헌정된 'Fantasy for 4 hands in f minor, D. 940'과 같은 명작을 남기게 됩니다.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과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도 유명한 피아노 듀엣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작곡가들이 베토벤의 교향곡을 피아노 듀엣 버전으로 편곡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피아노 듀오의 매력 : 2 pianos 4 hands
두 사람이 각자의 피아노에 앉아 마주 보는 포지션으로 연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마주 봤을 때 1st 파트를 맡은 피아니스트가 왼쪽에 위치합니다. 성부가 나누어져 있다기보다 각자의 역할과 비중이 같기 때문에 누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특별히 한 사람이 리드하는 것이 아닌 서로 밸런스와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피아노 듀엣과는 완전히 개념이 다르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피아노 듀오 파트너는 영혼의 단짝이어야 합니다.
나란히 앉아서 연주하는 피아노 듀엣의 경우, 숨소리나 팔꿈치를 살짝 건드리며 시작 사인을 주기도 하고 파트너의 손이 바로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인, 아웃의 실수가 거의 없습니다. 반면 피아노 듀오는 서로 마주 보고 있지만 물리적 거리가 상당합니다. 시작 사인을 비롯해 다이내믹과 템포, 그리고 컬러 등을 더 표현하고자 할 때 사인을 줄 수 있는 방법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의 음악을 눈빛과 마음의 소리로 읽는 것 밖에는요. 그래서일까요, 피아노 듀오 팀으로 활약하는 피아니스트들은 주로 형제, 자매 관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Lebeque Sisters와 Lucas & Arthur Jussen 형제가 대표적인 케이스지요. 혹은 아주 오랜 친구 사이인 경우도 매우 훌륭한 호흡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피아노 듀오는 흥미로운 편곡 작품이 많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루토슬라브스키의 '파가니니 바리에이션' 등 평소 익숙한 음악이 피아노 듀오로 재탄생한 작품이 대부분인데요, 두 대의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 색다른 음색과 효과가 나는 것이 매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 듀오 음악 역시 모차르트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한동안 작곡되지 않다가 후기 낭만에 이르러서야 피아노 듀오 명작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피아노의 형태가 발전됨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사운드의 폭이 넓어졌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기존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 피아노 이중주로 재편곡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라벨의 'Ma mère l'Oye(어미 거위 모음곡)'처럼 처음에 피아노 듀엣을 위해 작곡되었다가 이후 오케스트라 작품으로 발전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만큼 피아노 이중주 작품들은 작곡가들에게 피아노 소리의 확장에 대한 시도로 중요한 역할을 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앙상블 뷰티풀 랑데부의 피아노 듀오 연주를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피아니스트 김예담과 김가람이 들려주는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인데요, 두 사람 역시 15년간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로 호흡해온 사이라고 합니다. 두 피아니스트가 어떤 포인트에서 눈빛과 마음의 소리를 나누는지 눈여겨보시면 즐거운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 피아노 듀오 버전 by 피아니스트 김예담 & 김가람
https://www.youtube.com/watch?v=IcpPx2wYsJ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