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롤 체인지-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는 개뿔.. 이 ISTJ를 어떻게 할꼬..

by 유지니안

Bar 시험 합격 발표 직후, 나는 남편에게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자기가 Bar 시험 볼 때, 나 많이 아팠어. 근데 말 못 했어."

남편의 얼굴이 굳었다.

"몸살이 너무 심해서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었는데, 엘리 챙기고 집안일하느라 참았어. 여보 시험 준비하는데 방해될까 봐."

남편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내가 너무 나만 생각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남편의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이제부터 엘리는 내가 볼게. 자기는 좀 쉬어."




가을이 깊어가며 DPNS의 정규 학기가 시작됐다. 이번엔 남편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1년 반 동안 수업을 너무 많이 들어둬서 졸업 요건은 이미 다 충족했어."

남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UC Davis LLM 2년 과정을 듣고 있는 남편은 Bar 시험 준비를 위해 1년 반 동안 매 학기 거의 20학점 가까이 듣고 다녔다. (DC Bar는 non-ABA 학위가 있는 사람에게 미국 학위 졸업을 추가로 요구하지 않았다)

"이번엔 딱 4과목만 들으려고. 최소 10학점은 들어야 해서. 그리고 최대한 하루에 다 들을 수 있게 몰아서 들을 거야."

화요일과 목요일, 이틀만 학교에 가면 되는 시간표. 드디어 정말, '나만의' 자유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Duty day도 남편이 갔다. DPNS는 한 주에 한 번 부모가 와서 청소하고 장난감 정리하는 날이 있는데, 그동안은 내가 도맡아 했었다. 이제는 남편이 "오늘 duty day지? 내가 갈게"라며 먼저 나섰다.

엘리 통학도 남편이 도맡았다. 아침에 엘리를 깨워서 옷 입히고, 아침 먹이고, DPNS까지 데려다주고, 오후에 픽업하는 것까지.

"엘리야, 오늘은 아빠랑 학교 가자!"

"Daddy가 데려다준다고?"

"응! 이제 매일 아빠가 데려다줄 거야."

처음엔 엘리도 어색해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아침마다 "Daddy, let's go!"를 외치며 남편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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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기는... 처음엔 남편 혼자 보냈다. 그런데 30분도 안 돼서 전화가 왔다.

"여보, 사과가 종류가 너무 많은데 뭘 사야 해?"

"그냥 후지 사과 사."

"파는 어떤 걸 사야 하는 거야? 리크(Leek)?"

"아 그거 사면 큰일 나! 그거 파 아니야!"

10분 후, 또 전화.

"우유는 뭘 사? Whole? 2%? Non-fat?"

"우리는 Whole milk 먹고 있어. 엘리가 주로 먹으니까."

"갤런? 하프 갤런?"

"..."

결국 장 본 것들을 들고 온 남편. 막상 봉지를 열어보니 내가 부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물건들이 가득했다.

"하... 그냥 나랑 같이 가자."


그렇게 엘리를 DPNS에 두고 나와 남편, 단둘만의 시간이 시작됐다. Costco를 걸으며 이것저것 고르는 평범한 일상이 왜 이렇게 새로운지.

"이러니까 우리 꼭 신혼 같다."

"24시간 엘리만 챙기다가 이제 좀 숨 쉴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커피 한 잔을 사서 마시며 걷는 것도, 마트에서 천천히 물건을 고르는 것도, 모든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저녁 시간, 엘리 샤워도 이제 남편 몫이 됐다.

"엘리가 좀 더 크면 아빠가 샤워시키면 안 된대. 그니까 그전에 많이 해두자."

남편도 엘리랑 같이 한 시간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고 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엘리와 함께할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공감했다.

"엘리야, 아빠랑 목욕하자!"

"No! Mommy!"

"아빠가 재밌게 해 줄게. 거품 놀이하자!"

처음엔 거부하던 엘리도 점점 아빠와의 목욕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욕조에서 30분씩 물놀이를 시켜주니, 오히려 엘리가 엄마보다 아빠와 목욕하고 싶어 했다.


샤워 후, 엘리의 오후 일정도 남편이 담당했다. 오늘은 도서관, 오늘은 놀이터, 날씨가 더우면 아파트 수영장. 남편은 매일 다른 곳으로 엘리를 데려갔다.

하지만 남편이 가장 힘들어한 건 playdate였다.

"뭔가 쑥스러워. 엄마, 아빠들한테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어땠을 것 같아? 처음 와서 아무도 모르는데 미친 사람처럼 들이대고 다녔다고."

극 I인 내가 미국인들과 playdate까지 하는 데 들어간 노력과 흘린 눈물은 진짜 아무도 모를 거다. 영어도 서툴고, 문화도 다르고, 성격도 안 맞는데 제대로 정착하기에 웃으며 스몰토크를 했던 그 시간들.

결국 남편은 엘리의 playdate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대신 아빠와 딸, 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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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작된 엘리의 변화.

사실 엘리는 남편을 조금 어려워했다. 주6일을 일하고 신데렐라처럼 12시에 들어오면 정상 퇴근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무래도 나랑만 주로 같이 있다 보니, 남편을 대할 때는 어색함이 보였다. "Daddy busy"가 입버릇이었던 엘리였으니까.

그런데 남편이 주도적으로 육아에 참여하니, 엘리가 눈에 띄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Daddy, look! I can jump!"

"Daddy, 같이 놀아요!"

"I love you, Daddy!"

저녁마다 남편과 엘리가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아빠와 딸 사이는 쉽게 서먹해질 수 있다고 들었다. 특히 딸이 성장할수록 아빠와의 관계가 어려워진다고. 그래서 어릴 때 최대한 아빠와 스킨십하고 추억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데, 단 반년밖에 제대로 못 했지만 부녀에게는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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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남편에게 크게 실망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나서, 엘리가 잠든 후였다.

"여보, Bar 시험 합격에 내 지분이 얼마라고 생각해?"

오전에 만난 한국 친구 엄마가 불현듯 '엘리엄마가 고생이 많다'라고 하면서 '엘리엄마 지분이 80%는 넘을 것'이라고 한 농담에 별생각 없이 물어본 질문이었다. 그냥 '네가 다 했지,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어' 이런 달콤한 대답을 기대했을 뿐이었다.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음... 60:40?"

뭐야, 내가 60인 건가 싶어서 기분이 좋아지려는 찰나.

"그래도 내가 공부해서 시험 봐서 합격한 건데, 내 지분이 아무래도 더 높지."

순간 머리가 띵했다.


아, 내가 40이구나.

내가 커리어 희생하고, 공부도 포기하고, 원맨쇼로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한 결과가 겨우 40%? 네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엘리 때문에 화장실도 못 가고, 밥도 서서 먹고, 아파도 참으면서 버텼는데?

"왜 좀 더 줘보지 그래."

내가 비꼬듯 말하자 남편이 다시 계산하는 시늉을 했다.

"그럼... 51:49?"

하. 진짜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 2%의 차이가 뭐가 그렇게 중요했을까. 차라리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어" 한마디면 충분했을 텐데.


숫자로 계산하고, 그것도 자기가 51%라고 못 박는 그 모습이 너무 서글펐다. 변호사답다고 해야 하나. 권리 지분을 정확히 계산하는 그 모습이 씁쓸했다.

"그래. 역시 ISTJ네.. 네가 51이야. 축하해."

나는 그릇을 치우러 부엌으로 갔다. 남편이 따라와서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왜 이렇게 속상할까. 사실 누가 몇 퍼센트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인정받고 싶었다.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다고, 네 희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그런 말 한마디면 충분했는데.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나는 왜 여기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커리어도 접고, 공부 기회도 날리고, 오로지 남편과 엘리를 위해 살았는데, 그 결과가 49%라니.


옆에서 자는 남편을 보니 더 서러웠다. 저 사람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래도 엘리가 아빠와 더 가까워진 건 좋은 일이었다. 적어도 엘리에게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니까.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테니까. 나의 49%가 엘리의 100%가 됐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라고 스스로를 위로해 봤지만, 여전히 속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