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 결과를 기다리며 떠난 길, 요세미티
10월 초. Bar 시험 결과가 안 나와 초조해하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든 시기였다. 남편 눈치 보느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무작정 요세미티행을 결정했다.
"여보, 이번 주말에 요세미티 가자."
"하... 그럴까? 나도 집에서 결과만 기다리다 보니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그럼 내가 예약한다?"
꼭 한 번은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그 요세미티 국립공원이었다. 비록 예산과 엘리, 무엇보다 조금만 길게 운전하면 금방 피곤해지는 남편 때문에 남들 다 가는 라스베거스+그랜드캐년+데스벨리+세쿼이아 자동차여행도 못 가지만! 시애틀+밴쿠버+밴프+옐로스톤 자동차여행도 당연히 못 가지만! 적어도 요세미티만큼은 다녀와야 하지 않겠는가.
어린 엘리도 데려가야 하는 여행이니만큼, 기왕 가는 거 조금이라도 편하게 가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숙소가 바로 요세미티 밸리 랏지. 1박에 289달러. 비수기라 그나마 이 정도다. 성수기였으면 $400은 거뜬히 넘었을 거다.
출발 당일. 가는 길에 점심으로 먹을 겸, 아침으로 할 겸 김밥 10줄을 쌌다. 데이비스에서 요세미티까지는 차로 3시간. 하지만 두 살 배기와 함께라면 난이도가 달라진다.
"쉬 마려워!"
"배고파!"
"언제 도착해?"
결국 중간에 잭슨빌(Jacksonville) 근처의 비스타 포인트에 차를 세웠다. 설명을 읽어보니 잭슨빌은 댐을 만들면서 수몰된 골드러시 시대의 마을이었다고. 트렁크에서 접이식 캠핑 의자를 꺼내고, 아이스박스에서 김밥을 꺼냈다.
"아빠, 김밥!"
"우리 엘리는 김밥이 최고지?"
길가에 앉아 김밥을 먹으며 바라본 캘리포니아의 산맥. 이것도 나름 운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휴게소 $15짜리 햄버거보다는 낫지 않나 싶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Sierra Nevada Range)에 진입하고, 한창을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왕복 2차선 길을 달렸다. 우리는 초행길에 길도 어려워 정속운전을 했는데, 다들 무섭지도 않은지 엄청 빠른 속도로 우리를 지나쳤다.
"다들 목숨 두 개씩은 가지고 다니나 봐."
"진짜 이 구불탕구불탕거리는 길을 저렇게 달리다니... 멀미 안나나?"
분노의 질주를 찍던 차들을 앞으로 보내고 천천히 이동하길 1시간 즈음. 갑자기 차 안이 추워지는 걸 느꼈다.
"뒤에 옷좀 꺼내서 입자. 화장실도 좀 가고."
그렇게 잠시 정비할 겸 들른 곳이 바로 Tuolumne Grove. 우리가 처음으로 세쿼이아 나무를 만난 곳이다. 몸도 풀 겸 간단하게 한 30분 정도 산책하면서 피톤치드가 포함된 맑은 공기를 가득 마셨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조금 더 이동하니 갑자기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터널 뷰(Tunnel View)에서 내려다보는 요세미티 밸리의 전경, 브라이덜베일 폭포(Bridalveil Fall)와 거대한 화강암 절벽 엘 캐피탄(El Capitan)까지. 아직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청난 기대 속에 도착한 국립공원. 하늘에는 주황색 노을이 지고 있었고, 요세미티 계곡은 오래된 사진처럼 노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일방통행인 덕분에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빙 돌아서 이동하는 와중이었다.
"와 저기 사슴 있어!"
남편의 말에 나와 엘리의 고개가 왼쪽으로 휙 돌아갔다.
"엘리야 저기 봐 봐! 진짜 사슴이 있어!"
그 와중에 들판에 서 있던 순록과 눈이 마주치는 행운이 따랐다. 정말...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숙소 근처에 도착하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점심에 먹은 김밥은 벌써 소화된 지 오래. 숙소보다 먼저 푸드코트로 향했다. 평범한... 구내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샌드위치 2개에 치킨핑거 하나 정도로 시키자. 파스타는... 여기서 먹을 만한 분위기는 아닌 듯."
남편의 말에 주문했는데... 이건 뭐, 급식도 이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치킨핑거는 전자레인지에 돌린 것처럼 눅눅했고, 샌드위치의 빵은 며칠은 묵은 듯 퍽퍽했다.
"엄마, 이거 맛없어."
왠만하면 음식을 남기지 않는 남편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빨리 차에 있는 컵라면이 먹고 싶었다. 차라리 바로 숙소로 가서 라면부터 때릴 걸!
헐레벌떡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먼저 전기포트를 꺼내 물부터 올렸다.
물이 끓는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나는 진라면, 남편은 참깨라면, 그리고 엘리는 튀김우동.
"후루룩!"
"아, 이 맛이야!"
"역시 이 맛이야!"
엘리가 아빠를 따라하며 까르르 웃었다. $50짜리 저녁보다 $3짜리 컵라면이 백배 맛있는 이 아이러니. 창밖으로는 하늘 가득 별들이 반짝이고 있는데, 우리는 랏지에서 컵라면을 후루룩. 지나고 보니 추억이다.
다음날 새벽 6시, 창밖이 뿌옇다. 안개가 자욱했다.
"일어나 봐. 안개 낀 요세미티 장관일 것 같은데."
"으으... 조금만 더..."
"...300불 짜리 숙소에서 잠만 잘 거야?"
그 말에 남편이 벌떡 일어났다. 역시 돈 얘기는 언제나 효과적이다.
안개 낀 요세미티 밸리는 정말 몽환적이었다. 습한 공기, 피톤치드 향, 새소리.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때문에 이런 산책은 꿈도 못 꿨는데.
아직 어린 엘리를 데리고 본격적인 트레킹을 하기는 어려워, 간단한 산책 후 차로 공원을 둘러보았다. 슬슬 해가 뜨면서 안개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계곡 아래에서 바라보는 요세미티 절벽들과 폭포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우리가족 모두 바깥 풍경을 보느라 기분 좋은 적막이 흘렀다.
"저기는 어디야? 엄청 좋아보이는데?"
그러다 마주친 호텔. 그래, 그건 정말 "호텔"이었다. 그냥 숙소도, 랏지(lodge, 통나무집)도 아닌, 제대로 된 호텔.
"The Ahwahnee?"
무려 4성급 호텔이 요세미티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다.
'왜 여길 몰랐지?'
잘 터지지 않는 인터넷으로 가까스로 검색하니, 1박에 무려 $1,000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그랬구나. 모를만했구나.
이제 아침 먹을 시간. 어제 밤에 미리 검색해보니, 디그난스 델리(Degnan's Deli)의 비프 칠리 수프가 맛있다고 했다. 맛있는 비프 칠리 수프, 그리고 크루아상과 커피까지. 무엇보다 따뜻한 벽난로도 있었다. 뼈속까지 스며드는 쌀쌀한 공기에 얼었던 몸도 마음도 사르르 녹는 느낌이었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요세미티 폭포. 남편은 더 올라가서 보면 더 끝내주게 멋있을 거라고 설득했지만... 엘리도 그렇고 괜히 무리를 하면 안될 것 같아서 뷰포인트까지만 가기로 합의했다.
10월이라 물이 마른 개울가의 돌들을 징검다리 삼아 건너가니, 나무 사이로 폭포 한 줄기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4~5월의 요세미티와는 달리 물줄기에 힘이 없었다. 그래도 며칠 동안 내린 비 덕분에 다행히 바짝 마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산책을 마친 후 숙소에서 컵밥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다행히 푸드코트에 전자렌지가 있었다), 짐을 챙겨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글레이셔 포인트(Glacier Point)로 향했다.
"자, 이제 진짜를 보러 가자!"
글레이셔 포인트로 가는 길은 끝없는 커브길이었다. 엘리는 차멀미로 칭얼거렸고, 나도 속이 울렁거렸다.
"조금만 참아. 엄청난 거 보여줄게."
40분의 고행 끝에 도착한 글레이셔 포인트. 차에서 내리자마자...
"와..."
말이 안 나왔다. 하프돔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요세미티 밸리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였다. 이건 정말, 정말로 가치를 따질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 이런 장관을 볼 줄이야. 한참을 그렇게 서서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 다음으로 향한 곳은 마리포사 그로브(Mariposa Grove). 세쿼이아 국립공원까지 가기에는 엘리에게 너무 가혹한 일정 같아서 대안으로 뽑은 명소였다. 특이하게도 주차장에서 셔틀을 타고 들어가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트레킹. 생각보다 빡셌다. 그 와중에 엘리는 날다람쥐처럼 산을 타고 있었다. 도저히 따라잡을 자신이 없어 남편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오르막길을 30분쯤 걸었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드디어 나타났다. 자이언트 세쿼이아. 2,000년을 살아온 나무 앞에 서니, 내 37년 인생이 정말 찰나처럼 느껴졌다. 남편도 같은 기분이었을까, 자조 섞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Bar 결과가 뭐라고... 2,000년 된 나무 앞에 서 있으니 내가 왜 그렇게 초조해했나 싶다."
엘리는 쓰러진 세쿼이아의 거대한 뿌리 앞에서 깔깔 웃으며 '나무 요정!'하면서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순간 정말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거대한 나무, 작은 아이, 그리고 피톤치드 가득한 숲 속. 이런 게 진짜 여행이구나...
최대한 여행비용을 아끼기 위해, 저녁은 집에서 먹는 걸로 계획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교통체증에 걸려 예상보다 늦어졌다. 아직 데이비스까지 1시간이 더 남았는데 저녁 7시. 그 와중에 엘리는...
"엄마, 쉬 마려워! 급해!"
결국 로디(Lodi)라는 도시의 인앤아웃에 들렀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데이비스나 새크라멘토의 인앤아웃과는 달리, 앞에는 Security가 무장을 하고 서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그 요상한 시선들. 매장 안에는 라티노들이 대다수였고, 소수의 백인들이 따로 앉아 있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너희가 왜 여기 있어?'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둘러보니 동양인은 우리 가족뿐이었다.
"빨리 먹고 나가자."
"왜? 버거 맛있는데?"
"그냥... 빨리."
둔감한 남편은 여유롭게 버거를 먹었고, 엘리는 해맑게 감자튀김을 집어먹었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로디는 캘리포니아에서도 보수적인 농업 도시란다. 트럼프 지지율 70% 이상. 아, 그래서 그랬구나.
미국 생활 2년 차. 데이비스 같은 대학도시에선 잊고 살았는데, 여전히 우리는 이방인이구나. 737일을 살아도 영원한 이방인. 씁쓸했다. 아닌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넘었다. 엘리는 차에서 이미 곯아떨어졌고, 남편이 조심스럽게 안고 올라갔다.
"여행 괜찮았어?"
"가길 잘한 것 같아. 그동안 너무 paranoic했지?"
"그래 여보 Bar 결과때문에 스트레스 받는거 잘 아는데,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잖아. 마음 편하게 먹어."
"고마워 정말... 그런데 글레이셔 포인트는 진짜 미쳤더라."
요세미티라는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일개 개인은 얼마나 무력하고, 작아지는지. 세상의 일들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나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