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는 걸 일깨워줘서 고마워요, 릭
엘리는 릭의 검은 푸들, 찰리를 정말 좋아했다. 찰리는 에너지가 넘치고 영리한 개였다. 곱슬거리는 검은 털이 바람에 날릴 때마다 엘리는 까르르 웃었다. 아마 미국에서 만난 진정한 첫번째 친구일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West Manor Park에도 봄이 찾아왔다. 겨울 동안 잔디 밑에서 동면하던 땅다람쥐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두더지인가 했는데, 릭이 캘리포니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gopher이라고 알려주었다. 찰리가 신나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달려들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엘리도 나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Charlie! No!"
릭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검은 털을 휘날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찰리. 엘리가 깔깔거리며 웃더니 찰리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엘리도 잡을 거야!"
그 모습에 우리 모두 웃음이 터졌다.
찰리는 특히 공 가져오기 놀이를 좋아했다. 릭이 테니스공을 멀리 던지면 찰리가 총알처럼 달려가 물어왔는데, 어느 순간부터 엘리도 같이 뛰기 시작했다. 네 발로 뛰는 찰리를 이길 순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뛰는 모습이 대견했다.
"She's really smart. So much energy!"
릭이 흐뭇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엔 의아했다. 엘리는 아직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하지만 릭이 말하는 '영리함'은 학습 능력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였나보다. 활발하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기심이 많은 것. 그게 진짜 똑똑한 거라고.
어느 날 오후, 찰리와 뛰어놀다 지친 엘리가 나무 그늘에 앉았다. 릭이 내 옆에 앉으며 조용히 말했다.
"Let kids be kids. 아이들은 아이답게 자라야 해요."
그의 조언은 언제나 단순하지만 깊었다. 영어를 배우는 걸 조급해하지 말라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배운다고, 책 읽기를 숙제로 만들지 말라고. 덕분에 나는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제시와 페이지. 한때는 우리의 유일한 미국인 친구였던 그들과의 관계가 산산조각 났다. 생일파티 사건 이후로 연락이 완전히 끊겼고,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서로 못 본 척했다. 가슴 한편이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너무 예민했나? 문화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내 잘못인가?
며칠을 끙끙 앓다가, 결국 릭에게 털어놓았다. 공원 벤치에 앉아 찰리가 뛰노는 모습을 보며, 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냈다. 카풀 거절, 엘리의 왕따, 생일파티에서의 대립까지. 말하다 보니 눈물이 났다. 이방인으로 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우리가 뭘 잘못한 걸까요?"
목소리가 떨렸다.
릭은 찰리의 목줄을 잡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말했다.
"모든 관계가 다 좋게 끝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부당하다고 생각될 때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해요. Stand up for yourself. 미국에서는 참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에요."
그리고 덧붙였다.
"엘리도 보고 있어요. 계속 참기만 한다면, 엘리 눈에는 '우리는 약자고 참아야 한다'고 비칠지도 몰라요. 생일파티에서 당신이 강단 있게 행동한 건 정말 잘한 일이에요."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엘리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찰리와 노는 엘리를 보면서 '우리도 강아지 한 마리 키워볼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공용 세탁실도 버거운데 강아지 산책까지는 무리였다. 언젠가 좀 더 안정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보기로.
석양이 West Manor Park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시간. 찰리가 엘리 곁에 누워 꼬리를 흔들고, 엘리는 그 곱슬거리는 털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찰리, 내일도 놀자."
영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찰리는 알아듣는 듯 꼬리를 더 세게 흔들었다.
철저한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릭은 단순한 이웃이 아니었다. 우리의 문화 번역가였고, 육아 멘토였고, 무엇보다 진정한 친구였다. 인종도, 나이도, 국적도 달랐지만, 그는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었다.
It's okay to make mistakes. 실수해도 괜찮다는 것. 그의 따뜻한 격려가 낯선 땅에서 방황하던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모른다.
Gopher와 캘리포니아의 봄
캘리포니아의 공원에서는 봄이 되면 Gopher(캘리포니아 땅다람쥐)을 쉽게 볼 수 있다. 겨울 동안 굴속에서 동면하다가 따뜻해지면 나와 활동을 시작한다. 한국의 다람쥐와 달리 나무가 아닌 땅에 굴을 파고 산다. 크기도 더 크고 꼬리도 짧다. 공원 잔디밭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어놓아 가끔 골프장이나 공원 관리자들의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들과 개들에게는 최고의 놀이 친구다. 특히 봄철 번식기에는 더 활발하게 움직여서, 찰리 같은 개들의 사냥 본능을 자극한다. 물론 실제로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 땅다람쥐들이 워낙 빠르고 영리해서 금세 굴속으로 도망가버리니까. 데이비스 같은 대학 도시에서는 이런 야생동물과의 공존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이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태계를 관찰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