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불인(天地不仁)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 미셸 드 몽테뉴
한동안 가뭄으로 신음했는데, 며칠 동안 물 폭탄이 내렸다. 천지불인, 천지는 어질지 않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했다. 반지하 셋방에 사는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은 무심하다.
냉혹하게 법집행을 할 뿐이다. 오래 전에 시골에 살 때 물난리를 당한 적이 있다. 신나게 이사를 간 개울가의 오두막에 개울의 물이 밤중에 기습을 한 것이다.
밤 1시쯤 되었을까. 개 짖는 소리가 심상찮았다. 눈을 비비며 마루로 나가보니, 헉! 마당에 황토물이 그득한 게 아닌가?
나는 방으로 들어와 아내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자기야, 물난리야! 뒷집으로 도망가야 해! 현웅이를 먼저 뒷집으로 보낼게, 귀중품 챙겨.”
나는 큰 아이를 깨워서 안고 가슴까지 차오르는 물결을 가르며 뒤꼍으로 갔다. 큰 아이를 뒷집의 낮은 담에 올려놓았다.
“현웅아! 여기 꼭 잡고 가만히 있어! 아빠가 엄마랑 지웅이 데리고 올게.” 큰 아이는 “응!”하고 대답했다.
작은 아이를 깨워 안고 아내와 방을 나와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 새에 물이 더 불어난 것 같았다.
아내와 조심조심 걸어갔다. 개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뒤꼍으로 가니 큰 아이는 담벼락을 두 손으로 잡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날 밤은 뒷집에서 묵었다. 다음 날, 비가 멎은 새벽에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작은 아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집 이제 수영장 되는 거야?” 그 와중에도 작은 아이는 신난다.
작은 아이야말로 천지불인의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천지의 법에 순응해야 한다.
그때 물난리가 난 건, 천지의 법을 어겨서다. 개울의 상류에 서울의 모 유치원이 수련원을 세우기 산자락을 마구 파헤쳤기 때문이었다.
폭우에 마구 베어 쓰러뜨린 나무들이 휩쓸려오다 우리 집 앞 다리에 결려 물이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인재(人災)라는 말을 쓴다. 사람이 일으킨 재해라는 것이다. 그럼 좀 더 인간이 잘하면 재난이 없을까?
인위적으로 잘한다고 재난이 사라지지 않는다. 천지의 법을 어기지 말아야 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천지의 법과 인간사회의 법을 일치시켜왔다.
그러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인간은 인위적으로 잘 살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지의 법과 인간사회의 법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해마다 인재가 일어난다. 그때마다 인재의 원인을 찾는다.
18세기 후반에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만든 인류는 오만방자해졌다.
천지도 인간을 위해 조작할 수 있다는 망상을 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후 위기 등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졌다.
그래도 인류는 천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과학기술의 힘을 믿는 듯하다. 과연 그럴까?
탐욕에 젖어 눈이 멀어 과학기술의 신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현대는 일상이 비상상황이다.
천수를 다하는 사람은 드물다. 과학기술의 신을 숭배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은 과연 행복할까?
인간에게는 생존의 욕구도 있지만, 훨씬 더 중요한 영적 욕구가 있다 과학 기술로 물질의 삶이 아무리 풍부해져도 영혼의 허기는 견디지 못한다.
부자들의 자살률이 가난한 사람들의 자살률을 훨씬 능가한다. 인간은 본성을 어기고서는 행복할 수 없는 존재다.
고립된 채 물바다가 된 마을들
이제 천둥과 번개가 가득한 하늘아래
빌딩들은 폐쇄되고
신전은 무너질 것이다
폐허마다 운명처럼
덩굴이 올라갈 것이다
은행들은 바오밥 나무를 껴안은 채 사라지고
관공서엔 보아뱀이 알을 품을 것이다
즐거운 열대우림
바지 하나 걸치고 바나나나무 위에서 살리라
그때를 위하여
잠시 불편한 지금을 참을 수밖에
- 전윤호, <천국의 예감> 부분
시인은 ‘천국의 예감’을 노래한다. ‘그때를 위하여/ 잠시 불편한 지금을 참을 수밖에’
천지개벽은 진정 이렇게 올 수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