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과 배움

by 고석근

가르침과 배움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 공자 孔子 (BC 551-BC 479,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약수터에 갔더니 할머니 둘이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네.”하고 답례를 했더니 대뜸 조그만 책자를 내밀며 ‘영생의 샘’이 있단다.


요즘은 길을 묻는 전도인들도 있다고 한다. ‘길을 묻는 척하며 길(도)을 가르쳐 주겠다니?’


종교에서는 신앙인의 전도를 최고의 공덕으로 여기는 것 같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저렇게 막무가내로 전도할까?


상대방의 마음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신앙인이 누구에게 전도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전도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가장한 ‘인간 사냥꾼’일 것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가르쳐주지 않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는다.’


종교의 깨달음은 알려고 애쓰고 애태우는 사람에게만 온다. 공자는 깨달음을 얻었기에 그 과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을 끓이는데도 엄청난 공을 들여야 한다. 처음에는 아무리 열기를 가해도 끓을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물을 끓일 일념으로 계속 열을 가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물이 끓기 시작한다.


물이 수증기가 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겪지 않은 신앙인들은 “불신 지옥!”하고 다른 종교인들을 향해 마구 소리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 온 달마 대사가 소림굴에서 면벽 수도를 하고 있었다. 수행자들이 간간히 찾아왔으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느 날 혜가라는 승려가 찾아와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원했다. 무릎이 빠질 만큼 쌓인 눈 속에 서서 밤을 새웠지만 달마 대사는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혜가는 왼팔을 잘라 달마 대사에게 바쳤다. 그제야 달마 대사는 혜가를 제자로 받아주었다.


달마 대사는 혜가가 정말 배우려는 열정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제자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 혜가는 깨달음을 얻어 달마 대사의 후계자, 선종(禪宗)의 제2대 조사가 되었다.


지식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을 넘어선 지혜는 쉽게 가르치고 배울 수가 없다.


인간은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보이는 물질의 세계와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의 세계다.


물질의 세계는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에너지장의 세계는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신묘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이 물질을 넘어서 에너지장이 되어야 온 몸으로 그 신묘한 세계를 깨달을 수 있다.


이 에너지장의 세계를 모르면 우리의 사고가 물질의 유한성에 갇히게 된다. 물질이 전부인 줄 알아 물질에 집착하게 되고, 항상 탐욕에 시달리게 된다.


물질은 에너지장이 우리의 감각에 의해 지각된 것들이다. 즉 물질은 허상인 것이다.


온 몸이 에너지장의 파동과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영원한 우주의 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난 벼락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찰나의 낙뢰 속에서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는

나여, 그 섬광의 희열 밖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바람 불고, 느티나무 아래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내 전 생애가 운다, 벼락이여 오라

한 순간 그대가 보여주는 섬광의 길을 따라

나 또 한 번,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련다


- 유하, <내 육체의 피뢰침이 운다> 부분



시인은 ‘섬광의 희열 밖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물질의 세계는 환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 몸과 대기와 대지의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벼락이 쳐야 들어갈 수 있다.


벼락을 맞아 온 몸이 불타며, 그 짧은 섬광 속에서 그는 실제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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