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눈앞에 있다

by 고석근

진리는 눈앞에 있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오랫동안 인류는 지구는 네모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정말 그랬을까? 인류 중에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았던 사람은 없었을까?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은 배가 멀어져 가다 어느 순간, 서서히 사라져가는 광경을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처음에는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저 배가 저렇게 사라져도 나중에는 되돌아온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지구가 둥그니까.’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그 생각을 밀고 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구가 네모’라는 게 진리였으니까.’


어떤 진리에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게 된다. 보였더라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 “인간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진실은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눈은 정확하게 본다. 자신의 눈을 믿으면 된다. 그런데 우리의 뇌가 눈이 본 것을 걸러낸다.


진리는 ‘패러다임(생각의 틀)’이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진리는 한 생각이 만들어낸 인식체계일 뿐이다.


철학자 토머스 쿤은 말한다. “과학은 진보하지 않는다.” 과학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이 달라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진리의 감옥’에 갇히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진리를 찾아가야 한다.


‘이게 진리야!’ 이 한 생각에 빠지게 되면, 인간은 좀비가 된다. 막무가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책으로 배우지 말아야 한다. 조르바는 몸으로 진리를 터득해 간다.


그는 어느 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그는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혹한 경험을 하고 난 이후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 손바닥 위에서 죽어갔다.’


조르바는 길을 가다 번데기에서 나오려 몸부림치는 나비를 본다. 그를 위해 입김을 불어 넣어준다.


왜? ‘불쌍한 나비’를 도와주는 게 선이라고 배웠으니까. 선(善)은 진리니까. 하지만 나비는 불쌍한 존재였나?

스스로 깨치는 길밖에 없다. 깨치지 못한 상태에서 남을 도와주었다가는 그를 해치게 된다.


고대의 철인 노자는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고 했다. 도(道)는 자연(自然)을 따른다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맞게 사는 삶, 조르바는 경험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 헛되지 않으리.


- 에밀리 디킨슨, <내가 만일> 부분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우리 눈앞에는 수많은 할딱거리는 로빈새가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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