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공부를 시작한 게 2001년 10월부터니까 이제 만 23년이 되었네요. 유학 갈 때 교량의 안전에 관심이 아주 많았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서울시에서 교량 안전에 관련된 업무를 맡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최병렬 시장이 국내 감리를 못 믿겠다고 막 건설공사에 착수한 가양대교 건설공사에 유수의 외국감리사를 불러 들였는데, 영국의 Mott MacDonald사였습니다. 그 팀이랑 가양대교에서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이 많아 유학도 영국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들 일하는 시스템과 팀원 개개인의 책임감이라고 할까 일하는 모습에서 감동을 느꼈거든요.
그 해 7월에 영국에 가서 어학코스 거쳐서 10월에 학위과정을 시작했는데, 연구석사(Mphil)로 입학해서 중간에 박사 과정으로 전환(transfer)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석박사 동시과정이라고 할까요.
연구를 시작하면서 지도교수의 관심사항을 알게 되었는데, 그때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이거 유학을 잘못 왔나 싶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비슷하긴 하지만 성수대교가 무너진 여파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때라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안전점검을 더 열심히 해서 교량을 안전하게 관리하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는데, 지도교수의 관심 - 아니 영국의 관심 - 은 달랐습니다.
당시 제게는 너무 낯설기만 했지만, 어떻게 하면 불필요한 과잉 점검, 과잉 보수공사를 줄여 재원을 효율적으로 쓰느냐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교량을 점검(inspect)·진단(assess)하고, 보수(repair)·보강(strengthen)하는 일련의 절차에 판단 기준이 있는데, 기본적으로 설계기준(design code, standard)을 사용합니다. 일부 변형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어떻든 이 기준에는 건설재료, 해석모델, 기술자의 인적오류, 시공오차, 기상상황 등등 다양한 형태의 불확실성을 고려해서 안전율을 높게 설정하기 마련입니다. 또는 안전을 위한 구조물의 소요강도를 정할 때 불확실성을 고려해서 하중을 증가시키는 하중계수를 곱하고 구조물의 강도는 낮추는 강도감소계수를 곱합니다. 모두 불확실성 때문입니다.
영국은 설계 단계에서 시공 중 발생하는 모든 불확실성(uncertainties)을 고려한 이 기준으로 완공 후의 교량을 점검·평가하는 것은 너무 보수적(conservative) - 쉽게 말해서 너무 안전빵이다 - 라는 비판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에 관해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안전성 평가 기준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과잉점검, 과잉보수를 하느라 한정된 재원도 효율적으로 못쓰고 불필요한 교통통제등 사회적 비용도 낭비가 크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평가기준에 못 미치는 부적합한(sub-standard, inadequate) 교량들 중 상당수가 사실은 너무나도 안전하게 공용 중에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비판의식을 자극했습니다. 이론적 배경으로는 설계 중에 불확실한 요소로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요소(factor)들이 건설 후에는 그 불확실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그 줄어든 불확실성을 교량의 안전성 평가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고안전등급인 A등급을 받고도 무너지는 사례가 여전히 발생하고 있는 국내에서는 아직도 이런 논의가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사 중 콘크리트 강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많은 불확실한 요소를 완공 후에도 고려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이미 완성된 구조물의 콘크리트 강도는 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위치별로 강도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설계 당시만큼 그 불확실성이 크지는 않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방식이 신뢰성기반 교량평가기법(reliability-based bridge assessement)입니다. 이 기법은 우주공학 등 이미 다른 첨단기술 분야에서 개발된 개념이 교량분야로까지 확대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량분야에서 처음 적용된 것은 아니죠.
이 방식을 간단히 설명하면 강도감소계수, 하중계수 등 설계단계에서 사용되는 각종 계수를 적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량의 파괴확률 Pf를 구하고, 이 값에서 신뢰성지수(reliability index) 또는 안전지수(safety index)를 구합니다. 이 값이 목표지수(target reliability index, minimum acceptable index)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비교하는 방식입니다.
신뢰성지수의 목표값을 높게 잡을수록 파괴확률은 낮아지는데, 이 목표값은 결국 비용과 관련이 됩니다. 안전지수를 높게 잡을수록 이를 유지하기 위한 돈(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거죠.
이 파괴확률에 피해규모(인명손실, 재산피해 등)를 곱한 것이 위험성(risk)입니다. 즉 위험성평가방식은 파괴확률에 피해규모까지 고려한 겁니다. 신뢰성 기반 평가가 여전히 안전문제에 관심을 둔 것이라면 위험성평가는 구조물에 문제(failure, 고장)가 발생한 경우 그 피해까지 고려한 거죠. 그 값으로 순위를 매깁니다. 즉, 위험성의 순위를 구하고 나면 이를 근거로 보수·보강의 우선순위도 정할 수 있게 됩니다. (지금 고용노동부에서 산업재해를 줄인다고 위험성평가를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있는데, 사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엉터리라 이는 별개로 다룰 예정입니다.)
당시, 박사 과정을 하면서 내가 이 공부를 열심히 해도 한국에 돌아가면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인 안전확보에도 애를 먹고 있는 마당에 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때문이었죠. 적지않은 고민도 했었습니다. 국내에서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다른 분야로 주제를 바꿀까도 했습니다. 여러 생각 끝에 이를 주제로 학위를 받았습니다만, 걱정했던대로 국내에서는 이에 관해 입도 벙긋하지 못했었습니다.
지난 주, 성수대교 30년을 맞아 한국교량및구조공학회 기술컨퍼런스에서 지금의 우리나라 교량 점검 방식을 적어도 G7국가 수준으로 개편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표를 했습니다.
정부 측 참석자의 반응이 예산이 문제라고 답변하네요. 예산을 쥐고 있는 기재부 설득이 어렵다고 합니다.
답변을 들으면서 제가 박사 공부를 시작한 지 20여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 당시에는 우리와 전혀 동떨어져 있던 개념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시점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정말 말해야 할 때가 되었구나 싶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씁니다.
지금 우리가 시행하고 있는 정기안전점검, 정밀안전점검은 그 실효성이 거의 없는 점검 시늉에 불과합니다. 쓸데없는 돈 낭비이기도 합니다. 작년에 발생한 분당의 정자교 붕괴도 그렇고, 올해 주저앉은 대전의 유등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점검 방식으로 교량에 발생한 손상을 찾아내지 못했죠. 헛돈 쓰는 겁니다. 법적 요식행위에 불과한 시늉질에 아까운 세금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주점검(principal inspection)을 연장 90cm(0.9m) 이상의 모든 교량에 대해 6년에 1회 시행합니다. 6년에 한번 점검하지만 제대로 근접정밀점검(a close examination within touching distance)을 합니다. 다만, 위험성 분석을 통해 그 빈도를 8년, 10년, 12년까지 줄일 수 있도록 제도화했습니다. 교량의 거동에 대해 여전히 엔지니어들이 잘 모르는 불확실성이 남아있는 특수교량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점검빈도를 조정할 수 있게 했습니다. 불필요한 점검으로 인한 재원 낭비를 막을 수 있게 한 거죠. 이렇게 아낀 재원은 위험성이 큰 교량에 집중합니다. 위험성이 큰 교량에 대해서는 기술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점검빈도를 늘리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연장 100m 이하의 교량은 관리가 법적으로 의무화되어 있지도 않은데다, 정기안전점검, 정밀안전점검이라는 것을 하고 있지만, 거의 껍데기 수준의 점검을 반복하고 있죠. 1년에 2~3번의 정기점검, 1~3년에 1회 정밀점검을 하는데 그게 이름과는 달리 허당입니다. G7 수준의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만 근접점검이라는 의무조항이 없습니다. 그냥 멀리서 대충 봐도 그만입니다. 실제 정자교 점검비용이 33만원이었다는데 근접점검이 되겠습니까. 멀리서 들여다 보기만 해도 다행이지. 현장에 오지도 않고 지난 보고서 슬쩍 수정해서 제출하는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특수하거나 대형교량인 1종시설물만 조금 상세한 정밀안전진단이라는 것을 4~6년에 1회 시행하는데, 그것도 수중조사 같은 주요 점검내용은 의무과업이 아니라 선택과업으로 되어 있어 잘 이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 돈 때문이죠. 우리도 벌써 예산이 없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도 G7국가들처럼 크기와 관련없이 모든 교량에 대해 알찬 점검을 시행하도록 규정을 바꿔야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늘어나는 재원은 점검 빈도를 합리적으로 바꿔 대처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꿨으면 합니다. 대신 한번 하더라도 제대로 점검하는 걸로 말입니다. 물론 먼저 G7국가의 제도에 관해 심층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제도 개선까지 날라리로 되지 않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