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강력한 문구에 현혹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1년에 단 한번, 블랙 프라이데이 세일!'
한 달 전부터 온/오프라인 여기저기서 진행된 이 미국발 세일 행사에, 내가 평소에 눈여겨보던 손목시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티파니 민트' 빛이 살짝 도는 다이얼에, 실버 스테인리스 스틸 스트랩을 매치한 상큼한 디자인이었다. 올여름에 처음 발견했지만, 애매한 가격 때문에 구매를 망설였던 시계였다. 그런데 온라인 세일가에 쿠폰까지 더해 반값도 안 되는 가격이라니!
문제는 내 손목이었다. 내 신체 부위 중 유독 곱게 자란 딸내미 같은 부위로, 에르메스 팔찌 T1 사이즈가 겨우 맞는 얇은 내 손목. 웬만한 스트랩은 무척 긴 편이기에, 시계나 팔찌는 오프라인이 아니면 잘 구매하지 않는 품목이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결제 버튼을 클릭했다. 시계줄이야 뭐, 스틸 스트랩이니 집에서 수선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배송은 빨랐다. 제품 상자에는 예쁜 새 손목시계와, 스트랩을 줄일 수 있는 작은 꼬챙이 모양의 툴이 동봉되어 있었다. 스트랩의 몇몇 칸들을 자세히 보면 작은 동그라미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툴로 눌러주면 해당 칸을 뺄 수 있었다.
팔 힘도, 손재주도 없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오른쪽 두 칸 반 정도는 수월하게 뺄 수 있었다. 그런데 유독 왼쪽 칸들이 빠지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보고, 남편에게도 부탁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툴을 망치로 탕탕 쳐봤다. 위층에서 웬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으아아아 하고 소리 지르는 게 들렸다. 혹시 나 때문인가 싶어 망치질을 멈췄더니, 바로 조용해진다. 대낮에 책상 위에서 한 작업이었지만, 순식간에 층간소음을 일으킨 민폐 이웃이 돼버리고 말았다.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힘을 줘서 빨갛게 부은 엄지와 검지는 덤이었다.
괜찮다, 매장에 수리를 맡기면 되겠거니 싶었다. 며칠 후, 나는 공식 사이트에 있는 입점 백화점 리스트 중 한 곳으로 찾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매장이 없었다. 옆 매장에 있던 직원에게 물으니, 해당 브랜드는 이미 철수했다고 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공식 사이트에 있는 다른 백화점으로 전화를 해봤다. 아뿔싸, 다들 철수했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엊그제만 해도, 한 인플루언서가 인스타그램에서 그 브랜드의 시계를 차고 매혹적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만 부추기고 A/S는 나 몰라라 하는 모습이라니, 그 브랜드에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시계줄 줄이기에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리 예뻐도 무쓸모 한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남은 건 어딘가에 수리를 맡기는 것뿐이었다. 나는 동네 금은방을 검색해봤다. '아직도 금은방이 있나?' 싶었는데, 역시나, 집 가까운 곳에는 금은방이 전멸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시계 수리는 동네 금은방의 몫이었다. 아니, 각종 기념비적인 행사는 모두 금은방이 담당했다. 결혼 예물, 돌반지, 심지어 처음 귀를 뚫는 것조차 금은방에서 이뤄졌다. 나는 지난달에 결혼한 친구를 떠올렸다. 브랜드 웨딩링 모델명을 전부 꿰차고 있던 그녀. 티파니 밀그레인, 까르띠에 러브 링, 불가리 비제로원... 결혼식을 거치는 신부들은 모두 명품 전문가가 되는 법이고, 그만큼 금은방은 그렇게 인생 행사들에서 점점 밀려나는 듯했다.
예쁘고 어정쩡한 줄 길이의 그 시계는 처음의 설렘과 달리 점점 짐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금은방을 만날지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나는 외출할 때마다 그 시계를 가방에 넣어 다녔다.
기회는 그리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시간이 조금 흐른 어느 주말, 나는 성수동에 볼일이 있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볼일이 있는 장소 근처에 금은방이 하나 있다는 반가운 소식 때문이었다. 남편과 따로 만나기로 하고, 나는 잰걸음으로 금은방으로 향했다.
끼익, 딸랑. 금은방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노란 햇살이 앉은 작은 가게에, 빼곡하게 진열된 황금색 액세서리들이 눈에 띄었다. 벽에는 각종 디자인의 벽시계들이 걸려있었고, 그 앞에 진하고 처진 눈썹의 사장님이 앉아계셨다. 다소 연세가 있어 보이시는 그분은 나를 힐끗 쳐다보셨다.
"아, 안녕하세요. 혹시 시계줄 수리될까요?"
나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시계를 꺼내,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제가 다른 곳에서 산 건데요. 집에서 몇 칸은 줄였는데, 나머지는 도저히 줄여지지가 않아서요. 매장도 다 철수했다 그래서 수리도 못했구요. 근데 여기서 해주실 수 있으실지..."
괜히 말이 많아지는 나와는 달리, 사장님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시계를 쓰윽 가져가셨다. 진열장 안쪽에 살짝 들어간 작업용 책상이 있고, 그곳에 시계를 두신 듯했다. 잠시 후 '탕!'하고 경쾌하게 망치질하는 소리가 났다. 사장님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한번 차 보세요' 하며 시계를 다시 진열장 위에 올려두셨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흥분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이렇게 빨리요? 대단하세요! 전 죽어라 해도 안되더라고요. 집에서 망치로 두들겼는데 빠지진 않고 층간 소음만 일으킨 것 같았거든요... 아, 혹시 한 칸만 더 줄여주실 수 있으세요? 아님 지금 이게 제 사이즈 맞을까요?"
"시계 줄은 손님마다 선호하는 사이즈가 달라. 자기가 찼을 때 좋으면 좋은 거지."
사장님은 무심한 듯 말씀하시고는, 곧바로 한 칸을 더 줄여주셨다. 그렇게 줄여진 시계는 살짝 여유 있는 팔찌처럼 내 손목에서 찰랑거렸다. 예쁜 시계가 비로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풀지 못한 오래된 숙제가 한방에 해결되자, 내 기분은 무척 상쾌해졌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덕분에 시계를 찰 수 있게 됐네요! 혹시 얼마 드리면 될까요?"
사장님은 역시나 쿨했다.
"그냥 가져가."
"에이, 그래도 어떻게 그래요. 잠시만요..."
좋은 기분만큼 값을 치르고 싶었는데, 하필 현금이 부족했다. 나는 수중에 있는 5천 원짜리를 드렸다.
"아, 공짜로 해준다는데도 왜 돈을 내고 그래."
"마음 같아서는 더 드리고 싶은걸요. 아예 못 찰 뻔한 시계를 차게 해 주셨잖아요."
"허허, 이것 참... 그럼 거스름돈 줄게. 5천 원은 너무 많아."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사장님은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서 건네셨다. 빳빳하고 선명한 것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새 돈이었다. 세뱃돈 용으로 은행에 새 돈을 달라 그래도, 요즘은 쉽게 새 돈을 주지 않는다는 엄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와 이런 새 돈은 오랜만에 봐요! 완전 복돈이네요."
"나도 손님한테 받은 거야."
최소한의 돈만 받으신 사장님의 마음, 그리고 소중한 새 돈을 금은방에 냈을 손님의 마음까지 고스란히 전해받은 느낌이었다. 싱글벙글 좋아하는 나에게 사장님은 말했다.
"시계 고친다고 고생을 많이 했나 보구만. 이웃이 시끄럽다고 집에 찾아왔어?"
"아, 아뇨."
"그럼 된 거야."
잠깐 스쳐가듯 말했던 내 층간소음 히스토리에서 어떻게 내 기분까지 읽으셨던 걸까. 사장님의 무뚝뚝한 위로에 더욱 마음이 따뜻해졌다. 나는 큰 소리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고 금은방을 나왔다.
물건은 죽어있다. 하지만 계속 관리하고 함께 세월을 보내면 없던 생명력이 생기기도 한다. 매장 진열대의 새 옷 보다, 엄마가 물려주신 낡은 스웨터가 더 값진 이유이기도 하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익숙한 이 세상에서, 고쳐 쓰고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내 것'을 쉽게 버리지 않고 소중히 아낄 수 있는 마음을 길러준다.
무료로 받을 수 있는 서비스에 굳이 3천 원의 돈을 지불했다는 것은 사치를 부린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렇게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기술자에 대한 예우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부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