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by 장미의 이름
KakaoTalk_20260120_230314010.png

며칠 전부터 열이 올랐다 내렸다 번갈아 가며 몸을 흔들더니, 결국 식은땀에 옷이 젖은 채로 침대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평소 찬 음료를 좋아하지 않아 주방 한편에 놓여 있는 얼음 정수기에 얼음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는데, 얼음이 이렇게나 유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일회용 봉지에 잔뜩 얼음을 채우고 그대로 이마에 올려놓습니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는 나지막이 앓는 소리만 떠다니고, 나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버겁습니다. 그렇게 나는 겨울 한가운데에서 불청객처럼 찾아온 독감과 며칠 동안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에도 몸이 아프니 ‘엄마’가 떠올라 마음이 자꾸만 과거로 흘러갑니다. 자동적으로 ‘엄마’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가장 취약할 때 찾게 되는 보호 본능 같은 것이겠지요. 이쯤 되면 사람들은 아마도 부드럽고 다정하며, 온화하고, 희생적이기까지 한 엄마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네요. “엄마 손은 약손”을 조용히 읊조리며 아픈 아이의 등과 배를 쓸어주고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그런 ‘엄마’ 말이에요. 하지만 나의 ‘엄마’는 조금 달랐습니다. 남편 사업의 흥망성쇠에 따라 조금 살 만하다 싶으면 다시 고꾸라지고, 겨우 일어서면 또다시 흔들리던 거친 파도와 같은 삶을 버텨내는 것 자체로 충분히 고단한 사람. 자식에게 온기를 베풀기엔 이미 냉정한 현실에 얼어 있던 여인. 자식에게 조차 마음을 내어줄 여유가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생존 그 자체였던, 어렸던 나보다 더 작아 보이던 여인. 몸과 마음에 골병이 든 채 하루하루를 살며 아픔을 텅 빈 눈빛과 무표정으로 견디던 사람이 바로 저의 ‘엄마’입니다.


대학생 때, 요즘처럼 바람이 매섭던 겨울. ‘이놈의 집구석, 이 꼴 저 꼴 더는 보기 싫다’는 마음에 졸업 전시 준비를 핑계 삼아 작은 원룸 월세방을 얻어 집에서 도망을 나와 살던 시절. 기름보일러 때울 돈을 아낀다고 냉골방에서 패딩만 껴입고 버티다가 지독한 감기에 걸리고도 자존심 하나로 끝까지 집에 가지 않았던 날. 서럽고 아픈 건 몸보다 마음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를 악물고 버티던 어느 날, 엄마가 찾아왔습니다. 비좁은 방으로 들어와 뜨거운 이마를 짚어보던 그 손. 잠시 나갔다 돌아온 엄마는 변변치 않은 작은 주방에서 얼큰하고 뜨끈한 콩나물 국을 끓이고, 달짝지근한 소불고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밥을 정성껏 차려주었습니다. 갑자기 분주해진 작은 방안, 음식이 끓는 소리와 함께 따듯한 김이 천천히 공기를 데우고 방안은 어느새 따듯한 온기가 가득 찼습니다. 엄마의 손끝에서 시작된 따듯함으로 조금씩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던 순간. 그 따듯함은 불 위의 냄비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에서 피어오른 것이겠지요. 감기 약봉지를 건네주며 “약 먹고 빨리 나야지. 따듯하게 있어라.”는 짧은 말 뒤에 촉촉하게 고인 엄마의 눈빛에는 그동안 하지 못한 말, 참아온 마음, 걱정과 미안함 같은 것들이 묵직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자주 느껴보지 못한 사랑이었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는 늘 그 자리에 있었음을.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가 있습니다. 모성의 상징처럼 다정하고 헌신적인 모습으로 기억되는 엄마도 있겠지만, 과연 세상의 엄마들이 모두 하나같은 얼굴일 수 있을까요? 내 엄마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버텨내느라 자식에게까지 따듯함을 온전하게 내어줄 여유가 부족했던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장 약해져 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밥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건네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엄마가 요즘처럼 병치레로 몸이 지치고 마음까지 약해진 날이면 더 자주, 더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런 ‘엄마’가 그저 기억 속의 인물이 아닌, 지금 나와 함께 숨 쉬며 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새삼 깊은 감사함이 밀려옵니다. 이제는 엄마의 삶을 어린 자식의 시선이 아닌, 한 여인의 서사로 바라볼 수 있기에. 그토록 척박한 시간을 버텨낸 한 사람으로서 여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맙고 존경받아 마땅한 삶이라는 걸. 이렇게 말해줄 수 있어서. 나는 참 다행입니다.

이전 08화'열정'의 또 다른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