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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우키 Dec 11. 2023

김환기 화백의 뉴욕 일기

오래전 덕수궁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유영국 화백의 전시를 봤었다. 미술을 잘 몰라서인지 흥미가 덜해서인지 건축과 클래식 감상에는 돈을 지불하는 게 아깝지가 않은데 미술 전시는 안 가게 되었던 시절이었다. 아무리 유명한 전시를 간다 해도 정작 내 감상은 30분이 채 되지 않은 채 끝나서였을까?


그런 내가 유영국 화백의 전시를 본 날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강렬하기도 했지만 화백의 생의 몇십 년 훌쩍 뛰어넘은 현대에 감상해도 너무나 세련되었다. 그날 처음으로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림들 하나하나 발걸음 떼기가 아쉬웠고 스케일 큰 캔버스의 작품을 봤을 땐 그곳에 몇 시간이고 않아 있고 싶었다. 출구로 나가기 전 거꾸로 재 관람을 했다.  아트숍에서 엽서 몇 장과 화백에 관한 책을 구매하고 나서야 전시장을 나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읽은 화백의 여생에 관한 이야기는 전시 작품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진심이 그러나 그만큼 강한 성품으로 인해 쉽지 않았던 생활 등을 보며 "멋지다"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특히나 외골수로 하나에 꽂히면 주야장천 파야하고 뚜렷한 호불호로 대인관계가 늘 어려웠던 나에게 선생님의 글은 경외심 외 큰 위안을 주었다. 마음에 남은 큰 감동은 미술에 대한 관심을 싹트게 했다.


그때부터 서울의 다양한 전시와 미술관을 찾아다녔다. 그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의 아트숍에서 유영국 화백의 그림처럼 발걸음을 멈춰 서게 한 작품을 보았다. 아마 진품은 아니고 포스터를 액자화했던 것 같은데 김환기 화백의 "우주"였다. 김환기 화백의 전시를 보고 싶은데 몇 년은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올해 김환기 미술관에서 화백의 전성기 작품들을 관람할 수 있었다. 김환기 화백의 대부분의 작품은 캔버스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 저 캔버스를 당시 어떻게 실내에 들여왔으며 저 수많은 점과 그를 둘러싼 사각형을 일일이 얼마나 오랜 시간 공들여 그려 왔을까를 생각하면 감탄하다 못해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금번 전시회에서 내가 가장 좋았던 작품은 화백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 탄생한 무제 중 하나였다. 작품의 색은 이때부터 검은색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 것 같은데 보고 있노라니 고요함과 숭고함이 느껴졌다. 작가의 노트를 보면 당시 지인들도 세상을 떠났고 당신의 건강도 안 좋았지만 그 시기를 명랑하게 이겨내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작품에 그 마음이 녹여져 있던 걸까? 한동안 그 앞을 떠나지를 못했다.


전시회 이후 화백의 작업실을 구현해 놓은 공간을 보았다. 대형 캔버스와 물감들 수년의 세월을 그 둘과 함께했을 화백. 일부 캔버스는 실내에 들여올 때 문틈을 통과하지 못해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대형 사이즈 작품을 이어나가 주신 것이 감사했다. 관람을 마치고 아트숍에서 김환기 화백의 뉴욕 일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유영국 화가가 떠올랐다. 김환기 화백과 유영국 화가의 미술에 대한 진심과 열정.  독자로서 너무 멋있다가 짠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다 저분들은 정말 큰 별이시구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어쩜 저렇게 뜨겁게 생을 이어갈 수가 있었을까 싶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고 어마어마한 성실함으로 꾸준히 작품에 몰입했지만 그럼에도 종종 불안감과 싸워야 했을지도 모를 김환기 화백.

"한동안 그림을 잊고 멍하니 좀 쉬었으면 좋겠어. 이게 무슨 호사스러운 생각일까. 멍하니 있으면 더 불안해질 거야. 나 열심히 일해서 좋은 것을 만들어야지."

"내 그림 참 좋아요. 이제까지 것은 하나도 안 좋아. 이제부터의 그림이 좋아. 내 예술과 서울과는 분리할 수 없을 것 같아. 저 정리된 단순한 구도(構圖), 저 미묘한 푸른 빛깔. 이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세계이며 일이야."

"나 갈수록 좋은 그림 그릴 자신 있어요."

"종일 그림 그리다. 점화(點畵)가 성공할 것 같다."

"좋은 그림 그릴 자신이 있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세상은 왜 이리 적막할까."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공부를 하라. 그리고 자신을 가져라. 용감하라."

"내 재산은 오직 자신 (自信)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이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 이 순간부터 막막한 생각이 무너지고 진실로 희망으로 가득하다."

"죽을 날도 가까워 왔는데 무슨 생각을 해야 되나. 꿈은 무한하고 세월은 모자라고."

"일하다가 내가 종신수(終身囚) 임을 깨닫곤 한다. 늦기는 했으나 자신은 만만."

-Whanki in New York-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유영국 #김환기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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