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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Aug 12. 2024

까진 무릎



2024.08.13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이라는 노래 가사 마냥 농촌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낸 대한민국 농촌출신들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인터넷 혁명을 거친 AI 기반 정보화 사회까지  수 백 년간 점진적으로 발전해 온 서구사회의 발전단계를 한 생애만에 경험한 독특한 세대임이 분명하다.

인간의 무늬, 인문은 그 시대 공동체가 경험한 공간이라는 환경에 의해 그려지면서 기억 속으로 고착된다.

그 기억은 추억이라는 구동체를 달고 마치 뭉게구름이 피어나듯 둥실둥실 하늘로 날고 추억은 시간이 흐르면 행복한 상상이 되어 그 시절 괴롭고 고단한 기억은 소거되고 짜릿한 흥분으로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던 소싯적 에피소드는 무용담이 되고 활극이 되어 우리의 뇌리에 생생한 활동사진으로 재편집되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양념이 되어 인생의 감칠맛을 더하는 것이다.

그 무용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기민하고 재치 있는 재기 발랄한 악동들이 느릿하고 굼뜬 영감님들 과수원의  과일을 서리하면서 골려주는  대목으로 나아가면 악동들은 숲 속에서 나타난 로빈훗이 되고 굼뜬 영감님들은 좋은 것을 독차지하려는 키다리 아저씨나 스크루지 영감이 되기 십상이다.

 추억의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굼뜨고 느릿느릿한 영감님들의 아량으로 악동들은 잡히지 않았고 한 세대를 먼저 산 사람으로서 알고도 눈감아 준 것을 악동들은 빼어난 자신의 능력으로 로빈훗의 무용담을 완성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이제는 그때의 영감님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킬킬거리며 그 시절 악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하는 도상계획까지 마련한 악동들에게는 이제 거칠 것이 없는 의적이 되어 도척의 법까지 꿰고 있는 양상군자로서 품격까지도 갖추고 기습과 도주 그리고 집결을 물 흐르듯 매끄럽게 완성하고 기어이 노획한 물건에 대한 공평한 분배마저 마친 후 대들보 위에 금방이라도 올라가 양상군자의 도마저 실현시킬 태세이다.

이렇듯 소싯적 연마한 악동들의 기본기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비록 학교라는 담장 안에서도 군대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직장이라는 생업전선 앞에서도 나를 지키는 호신술로 변신하여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결정적인 역할로 인생의 산절수절을 넘고 건너게 한 것은 아닐까?

진달래 먹고 다람쥐 쫓던 야생의 나가 철이 들면서 살기 위해 학교로 가고 군대에 징집되면서 세상은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모했고 산업의 역군으로서 달 보며 출근하고 별 보며 퇴근하다 보니 정보화 사회로 바뀌면서 모든 경험을 가상세계로 집어넣는 게임과 시뮬레이션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를 장자의 꿈같은 한 세상을 보내고 내가 소싯적에 가졌던 야성은 다 어디로 달아났는가 궁금해질 때쯤 우리는 하늘을 보는 대신 물끄러미 땅을 내려다보게 된다.

 풀 죽은 우리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지는 찰나의 순간 마지막 안간힘으로 미련을 가지고 필사적으로 나를 살펴볼 때 아슬아슬하게 우리의 눈에 밟히는 우리의 찬란했던 소싯적 무용담의 든든한 지체였지만 이제는 앙상하다 못해 초라한 우리의 무릎을 발견한다.

젊은 날 어떤 순간에서도 나를 지켜주었고 여차 해서 세가 불리하면 득달같이 36계 줄행랑으로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었던 무릎, 그중에서도 까진 무릎의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나고 그 기억은 추억이 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소싯적 악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 그 시절 악동들은 다 어디 가고  그때 악동들의 혁혁한 전과를 증언하면서 함께 달려온 까진 무릎의 추억은 사라지고 휴대폰과 이어폰으로 무장한 AI시대를 보내는 다가올 세대들이 오늘을 기억하려면 까진 무릎 대신 난시와 난청을 추억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 생경한 의문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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