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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해 Aug 21. 2024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2024.08.22

배고픈 자에게 한 줌의 빵이 유용하고 목마른 자에게 한 모금의 물이 필요하고 어두움에 몸부림치는 자에게 한 줄기 빛이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배부른 자에게 산해진미는 고역이고  갈증이 없는 자에게  건네주는 한 컵의 물은 고맙게 생각하지 않으며 밝은 곳에서 바라보는 빛은 그저 눈만 부시게 할 뿐이다.

그저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삼라만상도 시의적절함이 있어야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다.

“관대하되 얕보지 않고(寬而不僈), 청렴하되 찌르지 않고(廉而不劌), 논쟁하되 다투지 않고(辯而不爭), 꼼꼼하되 격렬하지 않고(察而不激), 홀로 묵묵히 서 있되 이기려 하지 않고(寡立而不勝), 굳세고 강하되 난폭하지 않고(堅彊而不暴), 부드럽게 따르되 휩쓸리지 않고(柔從而不流), 공경하고 근신하되 너그럽다(恭敬謹愼而容)”는 순자가 제시한 군자의 덕목에서  예를 강조하여 악하게 태어난 본성을 제어하여 교육을 통해 인간을 개조하고 법을 통해 인간을 통제하는 현대 사회 질서의 뿌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사상을 말한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선한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이 선한 성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본다. 맹자는 이러한 인간 본성의 선함을 '사단(四端)'으로 설명했다. 이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구성된다. 이와 같은 맹자의 성선설은 동양철학의 기본이 되는 주자학에 뿌리를 제공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세상에 제시하였다.

빛나되 눈부시지 말라(光而不燿)라는 은인자중의 철학자 노자에게 있어서도 과유불급의 가르침만큼이나 때와 정도가 주는 철학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중하고 무겁다.

우리가 우주공간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태양과 불가원 불가근의 거리로 떨어져 있어 공전과 자전사이에서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팽이처럼 세차운동을 하고 있음에 기인한다. 즉 우리는 때와 정도를 떠나서는 한시도 살 수없는 존재임을 망각하고 늘 우리 마음대로 우리 생각대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착각은 자연에서 빠져나와 말과 글을 가지고 문명이라는 일종의 가상세계를 만든 인간의 원죄 같은 것이다.

자연과 세상은 엄연히 다르다. 비록 우리가 세상을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을 그저 이용가능한 재화 정도로 취급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자연을 착취하고 함부로 할 수는 있겠지만 자연의 섭리는 세상 속의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고 거대하다.

자연의 섭리와 세상의 원리는 완벽한 원본과 조잡한 사본 같은 관계다. 아무리 복사본이 잘 뻬겼다고 하더라도 결함이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인데 착각에 기반한 가상세계로 만든 조잡한 사본인 세상의 원리가 어떻게 억겁의 시간 동안 다져온 자연의 섭리를 대체할 수 있겠는가?

자연에 비해서는 창해일속(滄海一粟) 같은 한 줌 같은 세상의 원리가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기는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그래서 우리는 은은하고 겸손해야 하는 것이다. 테스형이 세상의 원리를 몰라서 크산티페에게 물벼락을 맞고 아고라에서 무지의 지를 설파한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인간 지성의 끝까지 자기를 데려가 보니 그것은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보면 너무나 하찮고 티끌 같은 것이라 깨닫는 순간에 테스형은 생사를 초탈했고 조잡한 세상의 원리가 지배하는 아테네의 한 줌도 안 되는 권력자가 주는 독배를 기꺼이 마시고 죽음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막연히 추측해 본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철에 따라 행동하면서 정도를 조절하는 정도를 아는 것이 세상이라는 원리에 때 묻은 우리가 세상의 때를 벗기고 철부지에서 사람이 되어 자연의 섭리를 깨달아 보는 원이라도 한번 세워보면 뭐가 달라질까? 갑자기 막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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