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해 록] 자연에서 나온 존재, 세상이 정해준 관계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는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문명의 가치관이 존재할 수 없다.
성실하지 못하면 이루어짐이 없다는 不誠無物(불성무물)도, 대장부는 실함에 머물지 그 껍질에 머물지 않는다는 是以大丈夫 處其實不居其華 (시이대장부, 처기실불거기화)라는 노자 38장의 말씀도, 존재 지향적 자연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관계지향적 문명의 가치관이자 세상적 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명은 글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세상을 밝히겠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번갯불을 가지고 장작불에 불을 붙였고, 장작불로 맹수를 물리치면서 실상의 자연에서 빠져나와 가상의 문자를 발명하면서 문명의 횃불을 밝힌 우리 인류에게 있어 스스로 그러하게 있는 거대한 자연을 문명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해석하고 요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일종의 가상세계의 문명을 만든 우리는 세상이라는 공간 속에서 유한한 시간을 사는 인간으로서 공과 시와 인이라는 존재적 실체에 관계를 더하여 공간, 시간, 인간이라는 사이적 존재, 즉 관계적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존재적 존재에서 관계적 존재가 되고 나면 만물을 스스로 그러한 존재로 바라볼 수 없고 사이적 존재, 관계적 존재로서 바라보는 가치관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하지 못하는 서자 홍길동에게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하는 상공이라고 불리는 홍길동의 아버지와 홍길동과의 사이, 부자간의 대화에서 문명이 야기한 가치관에 따라 부자라는 천륜마저도 존재를 부정하는 것을 너머 부자 사이와 관계를 얼마나 왜곡시켰는지의 적나라한 작품이 조선의 천재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꽃의 왕, 화왕 모란과 꽃의 여왕, 장미 그리고 억겁의 인연을 상징하는 연꽃과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로 유명한 다산多產의 꽃 대추꽃, 이름 없는 경사면 보잘것없는 구덩이에 피어나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온다는 호박꽃까지 꽃은 꽃이로되 다 같은 꽃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우리는 꽃에 의미를 붙이고 가치관을 투영하면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사이라는 여백에 관계를 입혀 파악한다.
원본인 자연에 비해 복사본인 문명은 태생적으로 존재를 왜곡하고 관계를 부각한다. 이러한 왜곡된 관계를 세련된 문명이며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끊임없이 가스라이팅 하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이다.
무성한 여름이 가면 풍성한 가을이 오고 가을걷이가 끝나면 황량한 겨울이 오듯이 고작 만년에 불과한 문자로 밝힌 문명이 38억 년 생명이 밝힌 자연을 쉽게 보면 우리가 백 년도 안 되는 인생계가 대부분인 것처럼 오인하여 행동하고 수 십억 년 생명계가 만든 자연이라는 존재를 0과 1이라는 이진법적인 계산기 안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착각을 수시로 반복하는 우를 범하기가 쉽다.
자연 앞에서는 인간도 대를 이어 유전자를 전달하는 유전자 전달체일 뿐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에 도전하는 인간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 앞에 문명이라는 횃불로 존재를 관계로 바꾸어 세상을 창조할 수는 있어도 생명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엄연한 진실 앞에서 우리는 지구의 스몰보이로서 우리를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