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포장된 다수대중, 결과로 말하는 소수의 천재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속에서 갈피를 잡기 힘든 갑론을박과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잣대의 혼란이 도를 넘어 중심이 흔들려 한 치 앞 미래도 깜깜한 현실이다.
먼저 일상을 사는 우리 국민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빠 미래까지는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 그저 무엇이 사리에 맞나 틀리나 분별정도를 하고 현재를 살아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정자는 국민의 위임을 받아 국민의 미래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에 앉아 중요한 판단을 하는 자리이다.
태생적으로 생존을 위해 현재에 삼매하고 있는 침묵하고 있는 다수는 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미래를 대비할 여력은 없어도 누가 나와 가족에게 번영을 안겨줄지 고통을 안겨줄지 정도의 사리분별쯤은 자연스럽게 동물적 초감각으로 느끼고 감지한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며 현재는 미래의 출발이기도 하다.
침묵하는 다수와 다수를 리드하는 혜안을 가진 소수의 천재가 거울과 같은 과거 앞에 서서 호의로 위장된 선동꾼에게 둘러싸여 있는 다수 대중의 선의로 포장된 아집을 박살내고 선의의 포장지를 벗겨 대중의 적나라한 현실을 거울에 비추어 낸다.
과거에 파묻혀 사는 대중을 현실을 사는 대중으로 변모시키는 소수의 리더이야말로 혜안을 가진 소수의 천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의 번영은 도대체 누가 선택한 결과이며 북조선 인민들의 초라한 일상은 또 누구의 선택일까? 한번 살펴보는 것이 현 시국을 바로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가 어떠한 미래로 나아가야 할 지의 시금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이 부딪치는 한반도는 태생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치열한 외교의 각축장이다.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신라의 김춘추가 보여준 살신 희생한 외교적 노력의 결과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고 고려 왕건도 경순왕은 물론 견훤마저 능수능란한 외교를 통한 회유를 통해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은 2차 세계대전 종전후 전후 세계질서가 충돌한 한국전쟁, 즉 전쟁이라고 하는 거친 외교의 결과물이다.
그 거친 외교의 한복판에서 신생 대한민국을 이끈 지도자가 평생을 하와이와 미국정가에서 탁월한 학력과 인맥으로 외교를 통한 독립을 초지일관 견지한 이승만이라는 리더를 선택한 대한민국과 소련군 대위출신의 젊은 야심가 김성주에게 미래를 위탁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결과가 어떠한 지는 지금 이 순간 삼척동자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현격한 국력의 차이로 다가오며, 이것이 바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팩트인 것이다.
세대가 두 번이나 바뀔 동안 체제경쟁을 해온 남북한의 성적표는 그 차이가 너무나 압도적이라 새삼 입에 담기가 무의미하다. 그동안 두 체제가 번영과 몰락을 하는 와중에서 번영은 번영대로 갖가지 문제점을 잉태했고 몰락은 몰락대로 심각한 재앙에 직면했다.
그러나 그 갖가지 문제를 덮고도 남을 번영을 이루어낸 우리 앞에 몰락한 왕조국가인 북한의 핵문제는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외교질서에 심각한 재앙으로 대두된다.
핵이라는 비대칭 전력은 극강의 외교전략이다. 사실 북한군이 가지고 있는 재래식 전력도 다른 나라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수령을 보위하고 쿠데타를 억지하는 대규모 사병집단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역사적 팩트를 두 눈 뜨고 보고 겪고 경험한 우리들 만이라도 갖가지 문제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외교적 초석을 다진 이승만이라는 혜안과 공과를 함께 가진 천재 덕분에 오늘의 번영이 있을 수 있었다는 너무도 당연한 역사적 팩트마저도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소수의 선동세력에게 발목이 잡혀 갑론을박을 넘어 이전투구로 밤을 지샌다면 실용외교를 통해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이루고자 침묵하는 다수를 리드 해가는 혜안을 가진 소수의 천재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 아닐까?
역사의 격랑 앞에 서있는 다수 대중들의 판단은 그 자체로 존중받는 역사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써 내려간 역사는 대체로 선의로 시작되고 호의에 속아 참혹한 결과로 이어지는 사례가 역사책의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국가의 흥망사는 다수의 대중과 소수의 리더가 함께 참여하는,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과정의 줄탁동시啐啄同時와 닮아 있다. 병아리는 때가 되면 알에서 나와야 살 수 있다. 그 절묘한 때에 어미 닭이 부리로 알껍질을 슬쩍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병아리는 수월하게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소수의 천재나 리더에게 기대하는 다수 대중의 바람은 그 문명이 나아갈 바를 밝히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 달라는 염원이지 문명이라는 알을 망치로 깨부수고 도로 야만으로 돌아가는 세뇌된 이념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더더더를 외치는 호의로 포장된 이념이나 사상이 선의로 충만한 다수 대중과 만났을 때 대부분의 공동체가 걸어갔던 그 길이 얼마나 참혹했는 지를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역사의 장에서 과거의 수사학에 휘둘리지 않고 현재의 심리학에도 좌우되지 않는 지혜로운 대한민국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