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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해 록] 백년전쟁 61. 5.16 혁명 1961

by 윤해



5.16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설왕설래 말도 많고 탈도 많은 1961년이 밝았다. 일에는 두서와 선후가 중요하다. 이 땅에 민주주의를 이식한 우남이 떠나면서 나라는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로 내달리고 있었다. 우남의 인색한 평가를 받은 장면총리는 사사건건 윤보선 대통령과 충돌하고 있었다. 당시 4.19로 정권을 이어받아 의원내각제로 시작한 신민당은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총리로 선출하여 출범하였다.

​신민당 정권 신구파인 윤보선과 장면은 서로 간의 권력다툼으로 국민들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사회적 혼란은 오히려 가중되어 가고 있었고 윤보선과 장면 정권은 정권 출범 1년 동안 우남이 기초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안조차 백지화되기 직전의 무정부상태로 사회적 혼란상태를 자초하고 있었다.

군주가 민주가 되고 독재가 자유가 되어나가는 과정은 늘 이렇게 비바람 불고 나아가 피바람까지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기 십상이다. 우남이라는 한성감옥 사형수 출신의 천재가 심어놓은 민주적 기틀은 4.19의 민주라는 명보다는 자유당의 전횡을 심판하자는 분함이 앞을 가려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는 볼셰비키 마냥 의거가 폭거가 되고 폭거가 폭동이 되는 해방정국의 멍석이 재현되는 혼란함으로 1960년 한 해는 저물고 있었다.

1961년은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국가가 당신에게 뭘 해줄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물으라."는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을 주장해 미국 국민들에게 영감을 준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였고 장면정권은 국가보안법의 모체가 된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 운동에 관한 법률(일명 데모규제법)' 시안을 공개하였고 곧이어 전국적으로 이 법에 대한 반대 데모로 정국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1917년 5월생 케네디가 미국에서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을 때 동갑내기 1917년 11월생 박정희는 여순반란사건의 사형수에서 살아 나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군에 복귀하여 기사회생하고 특유의 강직함과 실력으로 군 내부에서 신망받는 장군으로 성장한다. 제2군 사령부에 근무할 때쯤 장도영 참모총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김종필 등 육사 8기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5.16 군사혁명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한순간에 뒤바꾸어 놓은 그야말로 혁명적 사건이었다.

1908년 1월생은 4.19 의거 후 우남이 4월 26일 하야하고 6월 15일 허정 외무장관의 과도내각 체제에서 마련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국회를 통과하며 헌정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인 제2공화국이 출범하는 것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한 예감은 틀리지 않듯이 장면정권에서 날마다 데모로 지새우는 정국은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는 마치 민주주의의 실험장과 같았고 이념을 떠나 먹고사는 문제를 조속히 해결할 수 없는 정권의 한계 때문에 정국은 각계각층의 욕구와 불만이 한꺼번에 분출되면서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산업화는 시작도 못하고 모두들 민주주의가 망할 때까지 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5.16 혁명은 비록 수단은 쿠데타의 모습으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계엄으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모습으로 다가왔지만 세계사적으로 쿠바 핵 미사일 배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오면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이 냉전이라는 단순한 대치가 아니라 세계가 공멸하는 핵전쟁이자 제3차 세계대전으로 언제든지 비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떨고 있었고 자유진영 최전선에 있는 대한민국의 정국도 하루빨리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압력이 은연중에 작동함으로써 산업화의 영웅이자 여순반란 사건의 사형수 박정희는 케네디 정부의 쿠데타 승인 후 얼굴마담 장도영을 무대에서 내리고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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