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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해 록 ] 추석 연휴와 생사의 기로

by 윤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도 무색하게 지난여름 끝이 보이지 않던 무더위도 가을의 신산辛酸한 공기와 만나 여름은 자취를 감추고 더위에 맥을 못 추던 모기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추석연휴가 시작될 무렵 생사의 기로에 놓인 장인어른을 뵙기 위해 응급진료센터 옆에 위치한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작년 겨울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며 백수를 넘기신 100년의 파란만장했던 장인어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몇 년 전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의 삶을 담담히 구술하시는 내용을 받아 적으면서 망국의 일제강점기에서부터 21세기 번영된 대한민국 까지 긴박하게 돌아갔던 한 세기의 거시사 속에서 생존을 너머 잘 살기 위해 몸부림쳤던 한 개인과 가족의 미시사를 장인어른의 기억이 남아 있을 때 기록해야겠다는 알 수 없는 의무감으로 한 자 한 자 써내려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글을 마칠 무렵 이승에서의 인연을 거부하지 않고 백수까지 달려오신 삶의 고달픔에도 불구하고 노구의 몸을 이끌고 백세까지의 드문 삶을 힘겹게 이어오신 장인어른께서 추석연휴가 시작될 무렵 낙상 사고로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 병상에 눕게 되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세태를 뒤로 하고 간병에 나서다 보면 갖가지 본능과 모순 사이를 헤매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마치 하늘에서 우연히 떨어진 인간이라도 된 듯 부모 간병에 열외 하는 세상의 수많은 인간이 다수를 이루고 있고 늘 책임과 의무를 신줏단지처럼 부여잡고 생명 에너지를 갈아 넣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모두가 천연덕스럽게 부모의 마지막을 지켜보거나 외면하고 있지만 제자리에서만 뛰어도 신발은 닳아 없어지듯이 노화라고 하는 긴 병 앞에 장사 없고 결국 우리 모두는 시간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명멸해 가는 것이다.

사실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는 도화지 두께처럼 얇지만 현대 의료는 이 두께를 마분지 또는 골판지 두께 정도로 넓혀 놓았고 그 거리가 늘어나는 만큼 응급실을 찾는 환자에게 가해지는 생명유지장치는 치렁치렁 해져 갔고 그에 더해 삶과 죽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환자를 바라보며 신의 선택을 대신 떠안은 보호자들의 주저와 갈등은 극에 달하고 인간의 선택은 판단마비를 불러와 의식 없는 환자가 누운 중환자실 침상을 기계음 만이 들리는 무거운 적막 속으로 몰고 간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시절에 들었지만 막상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을 본다는 것은 슬프고도 괴로운 일이다. 사람의 아들 딸로 태어난 이상 이승에서의 생사고락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먼 길 떠나는 부모님과 헤어지는 별리의 고통은 당해보지 못한 사람은 미루어 짐작키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현대문명은 고령화와 응급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는 쉽게 숨을 거두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약 한 첩 못쓰고 돌아가셨다는 한 세대 전의 자조 섞인 푸념을 한풀이하듯이 응급의학과 예방의학은 의공학 기술과 결부되어 죽음의 9부 능선을 넘어간 사람도 살려내는 기적을 밥 먹듯이 반복하면서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이 되는 비참한 지경을 익숙하고 반복적으로 양산한다.

혼수상태의 환자를 앞에 두고 이제 살아남은 가족들은 어떤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할지, 마음이 괴롭고 몸은 고달파진다. 죽음을 일상에서 치운 대가는 의외로 혹독하다. 일상에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 못한 인간들은 죽음이라는 말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며 죽음을 직면하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 굴복하고 도망 다니기 바쁘다. 현대에서 존엄한 죽음은 일종의 사치로 치부된다. 그리고 존엄한 죽음을 위해 치러야 할 압박과 소외는 의외로 심각하다. 자본화된 의료가 구축한 배금의 성을 돌파하여 아무도 가지 않는 외로운 길 위에 서 있는 망연자실함이 곧 닥칠 가족을 잃는 슬픔을 압도하고 있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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