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두려워”

딸에게서 들은 말, 엄마에게서 배운 삶

by 북극여우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


이 라디오 광고 카피를 나처럼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여자 성우가 울부짖듯 외쳤던 그 문장 뒤로 <<세상의 모든 딸들>> 이란 책 광고가 흘러나왔었다. 그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르지만 분명 광고 카피만큼은 성공적이었다. 아직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것을 보면.


아마 세상의 많은 딸들은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품어본 적이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랬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엄마가 됐다. 이 오래전 라디오 광고가 갑자기 생각난 건, 최근 딸에게서 들은 비슷한 말 때문이다.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두려워”


이 말을 내 딸로부터 듣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다.


잠시 혼미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그 이유를 물었다. 그 이유는 엄마가 자식을 위하느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못하고 희생하며 살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자신은 꿈을 다 펼치기 전에는 아이들을 낳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듣고 나니 섭섭하기보단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들 때문에 크게 희생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나로서는 딸아이가 그렇게 느꼈다는 데 더 놀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냉정하게 말해서 나는 우리 딸아이의 '롤모델' 대신 '반면교사'가 됐다. 아이 앞에서 조금 작아진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딸아이가 언젠가는 ‘엄마처럼 살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더 잘살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어떻게 살아야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지만…


나도 젊은 때 우리 딸아이처럼 (직접 엄마에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느새 ‘엄마만큼이라도 살아야지..’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하늘의 뜻을 알아 순응하는 나이 지천명(知天命)을 넘은 다음에 비로소 나타난 변화인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하늘이 내게 점지해 준 엄마를 거스르고 거역하지 않게 된 것일까


어릴 적 조실부모하고 온갖 어려움을 겪었던 우리 엄마, 아버지가 지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실 때는 병수발도 도맡아 하셨으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아픈 내 동생을 몇십 년간 계속 돌보고 계신 어머니.. 큰 효도도 못 받으시고 항상 퍼주기만 하는 분.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다는 극복은 못하시더라도 삶을 끝까지 잘 붙잡고 계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을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눈을 들어 어머니의 얼굴을 보니 내가 기억하는 얼굴이 아니다. 어느새 몸은 굽고 머리는 반백이 되어버린 80넘은 노인으로 변해계신다.


지난여름에는 내 생애 처음으로 자진해서 어머니를 안아드렸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항상 뚱뚱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엄마 몸이 이제는 조그맣다. 한동안 그렇게 그냥 안고 있었다. 낯설면서도 또 낯설지 않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 올라왔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다.


'이제 내 남은 생애를 엄마만큼 살아낼 수 있기를..'


우리 딸은 가끔가다 들려주는 할머니의 인생 얘기를 흥미롭고 감동에 겨워하기도 한다. 영화제작자를 꿈꾸는 딸은 다음에 한국에 가면 할머니의 인생 얘기를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딸아. 엄마처럼은 살지 않더라도 할머니만큼은 살아다오.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끝까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할머니만큼만 살아다오.


p.s. 이 글은 몇 년 전에 썼던 글로 딸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러 한국에 가서 할머니와 몇 달간 살았지만 끝내 이야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습니다. 어릴 적 얘기 꺼내시는 것을 여전히 고통스러워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를 지켜드리는 것이 영화 한 편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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