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쓰고 죽겠다’는 핀란드부모들,그 뒤에 남겨진 것
어느 날 지인이 곧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며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런데 이사 가는 이유가 꽤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그 부부는 남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준 집에서 몇 년간 살았었다. 그런데 그 집의 법적 소유주인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집을 비워달라고 통보한 것이다. 한술 더 떠, 그 시어머니는 아예 대놓고 이렇게 선언하셨다고 한다.
집 판 돈으로 죽기 전까지 인생을 좀 더 즐기고 싶구나. 이 돈은 죽을 때까지 다 쓰고 갈 생각이다. 가능한 한 빨리 집을 비워다오.
부부는 많이 섭섭했지만 시어머니의 요청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과 시어머니 사이의 관계는 그 후 많이 소원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엔 이 시어머니가 유별난 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핀란드 언론의 여러 기사를 접하며, 이 분의 생각이 요즘 핀란드 노부모들의 보편적 정서이며 심지어 트렌드임도 알게 됐다.
"마지막 남은 유로는 장례식 비용으로"
"가장 완벽한 재정은 죽는 날 통장 잔고 0원"
핀란드 신문에 나온 노후 자산 관리 기사의 제목들이다.
"가진 것을 모두 다 써버려라"(Kaikki sileäksi), "잔고를 제로로 만드는 전략"(Nollasaldon taktiikka)은 요즘 핀란드의 성공한 노년 생활을 나타내는 핵심 키워드다. 노후를 잘 보내는 사람은 자녀에게 재산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남은 자산을 인생 마지막까지 잊지 못할 경험으로 치환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돈으로 즐기는 내 낙(樂)"(Omat rahat, omat huvit). 이 말도 핀란드 노년층이 좋아하는 문구다. 내가 번 돈이니 내가 즐겁게 쓰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다.
자녀에게 돈을 상속하게 되는 것은 자산관리를 완벽하지 못한 '계획의 실패'로까지 여겨진다. 상속세까지 물어야 하니 그야말로 '쓸데없는 낭비'라는 것이다. 노후를 보낼 자산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살고 있는 집을 담보로 연금을 받는 역모기지 대출 방법도 사용한다. 자녀 입장에서는 사실상 유일한 상속 자산인 ‘집’까지 사라지는 셈이다.
핀란드 신문에는 이렇게 마련한 돈으로 수억 원대의 최고급 캠핑카를 사고 유럽 전역을 누비는 실버 카라반 족 노부부 이야기가 종종 실린다. 행복한 미소를 띠며 이들은 말한다.
아이들에게 여행지에서 엽서를 보내요. 우리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아이들도 행복할 거예요. (아이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죠!
자녀에게 "독립심”과 ”생존 기술"을 알려주기 위해서 유산 상속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고 말하는 부모도 많다. 핀란드 아이스하키의 전설적인 인물인 테무 셀란네(Teemu Selänne)도 이렇게 공언했다.
내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길 바랍니다. 부모의 돈이 아이들의 성취동기를 잠재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최근 《어떻게 백만 유로를 모으고 소비할 것인가(원제:Miten miljoona hankitaan ja kulutetaan)》라는 책을 펴낸 베사 푸토넨(Vesa Puttonen) 교수 역시 비슷한 얘기를 한다. 자녀에게 유산까지 남기지는 않겠다며, 진정한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경제적 자립 능력을 갖추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핀란드 부모들 사이에는 유산이 꼭 유형적일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자녀에게 통장 잔고나 부동산보다 어릴 때부터 여름 별장에서 도끼질과 불 피우는 법을 전수해 주는 것이 더 유익한 유산이라는 것이다. ’아날로그적 생존 기술’을 익히게 도와주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과연 같은 생각일까.
표면적으로 핀란드인들은 부모가 유산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는 듯 보인다. 최근 북유럽 최대 은행인 노르데아(Nordea)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핀란드 성인 응답자의 약 70% 이상이 '부모는 자신의 재산을 노후 즐거움을 위해 자유롭게 쓸 권리가 있다'고 답했다. 또 자녀 세대의 절반 이상은 부모로부터 상속받을 재산을 자신의 미래 재정 계획에 포함시키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핀란드의 진짜 민심을 엿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결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부모님은 매년 남유럽으로 호화로운 휴가를 떠나고 비싼 테슬라를 타신다. 하지만 나는 당장 월세를 내기 위해 투잡을 뛰고 있다. 부모님이 그 돈을 스스로 버신 건 맞지만, 자식이 힘들게 사는 걸 보면서도 '네 인생은 네 것'이라며 웃으며 여행 사진을 보내실 때면 가끔 이 가족 관계가 무엇인지 회의감이 든다.
부모님 세대는 핀란드의 경제 황금기에 싼값에 집을 사고 저축했지만, 우리는 불안정한 노동 시장과 높은 월세에 시달린다. 부모님이 '다 쓰고 죽겠다'고 선언하는 것은 세대 간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과 같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추억이 깃든 집을 나에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팔아버렸다. 그 돈으로 이제부터 크루즈 여행을 다니실 거라고 한다. 물론 부모님의 권리인 건 알지만, 내가 돌아갈 '고향'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이라 며칠을 울었다.
돈과 관련한 부모의 차가운 태도에 상처받은 글도 꽤 많다.
부모님은 부자인데, 나는 왜 빈곤층인가
부모님의 은퇴 자금 1%면 내 학자금 대출이 해결될 텐데
명절에 부모님 댁에 방문했는데, 할머니인 어머니가 손주들에게 줄 선물 비용까지 정확히 계산해서 나중에 청구하시는 걸 보고 정이 뚝 떨어졌다. 유산을 안 주는 건 이해해도, 가족 간의 사소한 주고받음까지 '경제적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계산기로 두드리는 건 너무 가혹한 것 같다.
부모는 독립심, 성취동기 고취, 행복 추구 등 여러 좋은 말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지만, 자녀들의 눈에는 달리 비친 면이 있는 것 같다.
이는 핀란드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스웨덴은 북유럽 중에서도 가장 철저한 개인주의를 실천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상속세를 폐지해서 상속이 더 활발해질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부모들이 노후 삶의 질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다 쓰고 가는 분위기라고 한다. 핀란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다.
그렇다면 왜 유독 북유럽 국가에서 이런 현상이 많이 벌어지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국가가 가족을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적 안전망'을 갖게 된 북유럽 복지 국가의 구조는 역설적으로 서로 경제적 도움을 주고받으며 강화될 수 있는 가족 간 공동체 의식과 정서적 연결을 약화시켰다.
핀란드 한 네티즌은 이렇게 말한다.
국가가 최저 생계는 보장해 주지만, 부모의 따뜻한 지원이 주는 심리적 안정감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핀란드 부모들은 국가가 다 해주니 자신들은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리는 '가족'인가, 아니면 그저 '같은 성씨를 쓰는 남남'인가?
핀란드에 와서 처음부터 느꼈던 건, 한국에서 어릴 때부터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충효 사상’이 이 나라에서는 균형이 살짝 어그러져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충(忠)은 비교적 강한데, 효(孝)는 덜 강조되는 느낌이었다.
효(孝)라는 한자는 어른(老)을 자식(子)이 받들어 떠받치는 모습이다. 이는 단순히 "부모에게 잘한다"는 개념을 넘어 세대 간 떠받치는 책임과 연결을 상징한다. 중간에 국가가 끼어들게 될 때 이 관계는 붕 뜨게 된다. 자식은 굳이 자신을 위해 큰 희생을 하지 않았던 부모를 떠받들 이유가 별로 없다. 물론 부모 역시 떠받쳐질 필요가 없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자립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최근 '신(新) 독립 노년'층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들의 의도는 핀란드 부모와 좀 다른 듯 보인다. 한국 노년층이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자녀에게 경제적 부양의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핀란드 부모가 '나의 즐거움'에 더 가치를 둔다면, 한국 노년층의 독립 선언 이면에는 자녀가 나를 부양하느라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자녀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다.
다시 지인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남편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어머니와의 관계를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핀란드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카드를 보내며 화해의 제스처를 몇 번 취했지만, 아들은 여전히 ’읽씹’ 상태다.
꼭 돈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어머니로부터 받은 실망감이 꽤 큰 것 같다고 지인은 말한다. 중간에서 다리를 놓으려 했지만 쉽지 않다고... 그 시어머니는 집을 팔아 노후를 즐길 돈은 얻었을지 몰라도, 하나뿐인 아들과의 끈끈했던 정은 잃어버린 듯하다.
유산을 남기는 것이 정답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인생을 위해 다 쓰는 것이 정답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