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라는 걸 처음 본 것은 국민(초등)학교 때였다. 몇 학년 때였는지 까지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단체로 관람한 ‘엑스포 70’이라는 영화이다. 당대 최고 배우였던 박노식과 당대 최고 악역 배우였던 허장강 같은 분들이 출연한 영화였는데,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모두가 “어~~~”하면서 손에 땀을 쥐었고, 정의가 승리했을 땐 다 같이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단체 영화 관람이 문화적 소양 고취를 위한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지침이었는지 가끔씩 영화를 볼 기회가 주어졌는데, 거의 대부분 정의가 승리하는 비슷비슷한 영화였던 것 같다. 물론 여자 아이들은 대놓고 울어 젖히고, 남자아이들은 운다는 걸 들킬까 봐 상영시간 내내 슬픔을 꾹꾹 눌러 참아야 했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영화도 있었지만.
옛날 영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주말의 명화이다. 흥행성, 작품성 등을 고려해서 꽤 좋은, 그야말로 명화들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이었는데, 문제는 방영시간이 밤 10시 이후라는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일관성 있게 내 곁을 지키고 있는 초저녁 잠이 문제였으니, 매번 가열 찬 기대감으로 ‘빠바바밤’ 하는 시그널 음악까지는 듣고 보지만, 영화를 끝까지 본 적이 거의 없어서 내용은 모르고 제목만 알게 되는 수많은 명화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제목도 알고 내용도 알게 되는 기적 같은 일도 간혹 일어났는데, 대표적 버디무비인 ‘내일을 향해 쏴라’와 탈출 영화의 대명사가 된 ‘빠삐용’이 초저녁 잠을 이겨낸 영화이다.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배경음악으로 한 폴 뉴먼과 캐서린 로스의 자전거 씬은 애틋함과 설렘이었고,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를 향해 권총을 쏘면서 뛰어 나가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마지막 장면은, 세월이 흐른 후 본 ‘델마와 루이스’의 절벽을 향해 차를 달리는 마지막 장면과 함께, 가장 매력적인 엔딩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줄무늬 죄수복과, 어느새 감옥에 안주해 버린 더스틴 호프만의 깨진 안경과,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티브 맥퀸의 누렇게 썩은 이와, 그들의 헤어짐과, 바다로 뛰어내리는 장면 등으로 남아 있는 ‘빠삐용’은 그 옛날 그 늦은 시간에 끝까지 봤다는 이유만으로도 명화일 수밖에 없다.
싸움을 싫어해서인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유명한 이소룡이 출연한 무술영화 조차도 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친구 손에 이끌려 본 ‘취권’은 내가 본 몇 편 안 되는 무술영화 중 최고의 영화가 되었다.
진지한 무술 장면도 ‘저게 말이 되나?’라는 시선으로 보던 나로서는 진지함을 빼버리고 차라리 코믹함과 쇼맨십이 가미된 액션이 좋았고, 맨 정신일 때는 맞기만 하다가 술이 취하면 이기게 되는 뒤틀림이 좋았던 것 같다. ‘취권’이 명화인 것은 매년 명절 연휴마다 TV에 방영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가끔 방영되고 있으니 당연한 것일 테고.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또는 영화관은 젊은이들만 가는 장소라는 이상한 생각으로 한동안은 비디오테이프로 B급 영화들만 보면서 지냈는데, 다시 영화관으로 발길을 향하게 한 영화가 ‘사랑과 영혼’이다.
워낙 입소문이 나서 아내와 같이 극장을 찾았는데, 묘하게도 주인공보다 조연인 우피 골드버거가 더 눈에 들어왔고, 영화가 끝난 후 불이 켜졌을 때 여고생들이 가득한 객석에 우리 부부만 있었던 열쩍은 추억이다.
한 번의 열쩍음을 무기로 간간히 영화관을 찾곤 했는데, ‘친구’의 관객 동원으로부터 시작되어 ‘실미도’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적 같은 일이 한국 영화계에 일어난다.
천만 명이 본 영화는 봐줘야 하는 게 예의기도 하지만, 한 명, 한 명이 모여서 천만이 되기 때문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의 의무감(?)으로도 천만 영화들을 대하곤 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영화처럼 세월이 흘렀다. 그 옛날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볼 수 있었던, 늦은 밤 졸린 눈 비비면서 버텨야 했던, 주머니가 열악해서 연례행사처럼 어렵게 찾았던, 나이 들었다는 이유로 열쩍게 찾아야 했던, 그 영화보기가 지금은 너무나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언젠가부터 벽에 걸리기 시작한 TV는 영화관만은 못해도 어느 정도 시네마스러움을 갖추었고, 리모컨 몇 번 만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마음대로 골라 볼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요즘 들어 옛날 주말의 명화에서 놓쳤던 제목만 알고 내용은 모르는 명화들을 슬금슬금 찾아보고 있다. 지금 시각으로는 약간 어설프기도 하고, 억지스럽기도 한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저 때 저런 생각을’하는 놀라움도 느껴가면서.
지난해에 한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윤여정이 아카데미에서 연기상을 받았다. 아직 수상작을 보지 못했는데, 천만 영화를 봐주는 게 예의 듯이 아카데미 수상작도 봐주는 게 예의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