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이야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 - 굳이 고사에 나오는 얘기 거나, 교훈적인 것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네 자로 된 성어라면 사자성어라는 게 내 주장이다. - 는 ‘천재악필’이다. 좋아하는 이유는 내 글씨가 악필이기 때문인 것은 당연한 것이고…
글씨체가 좋지 않은 이유는 빨리 쓰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천재는 머릿속의 움직임이 빨라서 그걸 빨리 적기 위해 쓰기가 빨라지고 그래서 악필이 된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억지스럽다. 그러나 성격이 급해서 빨리 쓰는 사람이 악필인 경우가 많은 건 확실한 것 같다.
젊을 때에는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하지만 맡은 부분에서 순간순간 생기는 일들을 바쁘게 처리하고, 나이가 듦에 따라 신속하게 해야 하는 일은 줄어들지만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지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젊었을 때의 악필은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나이가 들어서도 이놈의 글씨가 좋아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금껏 한 번도 글씨를 잘 써보려고 애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컴퓨터 사용이 일반화되고,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글자는 쓰는 것이 아니라 키보드를 누르는 것으로 세상이 바뀌었으니,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한 것 일수도 있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뭔가를 끄적이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제야 비로소 내 글씨가 엉망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필사이다.
필사라는 게 책에 있는 좋은 글귀를 노트에 정성스럽게 베껴 적는 행위를 말하는데, 세상에 좋은 책은 많기도 많아서 좋은 글귀는 차고 넘치지만, 그걸 보기 좋게 베껴 적기에는 내 성격이 너무 바쁘고, 또 내 손놀림도 너무 바빴다. 그래서 글자를 한 자 한 자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적기 시작했는데, 그랬더니 글씨가 갑자기 확 좋아진다던지 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으나 조금은 보기 좋은 글씨체로 바뀌어 간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필사의 시작은 악필 탈출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지만, 하다 보니 필사 거리를 찾기 위해 천천히 정독하게 되고, 좋은 글귀를 골라내게 되고, 내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게 되고, 손을 많이 쓰게 되고, 그에 따라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고, 또 그에 따라 늙지도 않고 여전히 팽팽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바쁜 성격도 조금은 늙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오늘도 빨리 나가려는 손을 노려보며 바쁜 성격 고치려는 글쓰기를 수행한다. 목표는 물론,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