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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Oct 10. 2017

당신을 생각합니다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 시간은 참 특별하다. 상대에게 필요할지, 상대가 좋아할지를 생각하며 몇 번을 내려놓고 다시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선물을 고르는 시간을 내내 '오로지 그 사람만을 위해' 빚어낸다. 내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선물을 고르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색 하나부터 모양까지 몇 번을 대조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의미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은 언제나 감사하다. 심지어 추파춥스 사탕 하나를 받아도 그 잠깐 동안 날 생각하며 맛을 골랐을 것 아닌가? 내가 싫어하는 맛, 좋아하는 맛을 생각하면서 나에게 어울릴 맛을 찾았을 것이다. 참 낭만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장 값어치 있는 선물로 ‘편지’를 꼽는다. 선물을 고르는 동안 상대를 떠올린다면, 편지는 글을 쓰는 긴 시간 동안 상대를 생각한다. 어떤 내용을 쓸지 고민하고, 어울리는 편지지를 골라 몇 번을 적었다 지웠다 고민하다 적으면서 그 감정을 소중하게 포장한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편지를 받아본 적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혹여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은 당신과 분명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에 보냈을 거라고 확신한다. 선물은 별로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도 줄 수 있다. 선물을 고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거나 혹은 아예 생각하지 않아도 구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 사람이 뭘 좋아할지 고민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매장에 들어가 아무것이나 사도 선물이 된다. 흔히들 음료 한 잔, 밥 한 번 사는 것처럼 간단한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는 생각을 안 하고 쓰는 게 불가능하다. 하다못해 이름 석자를 쓰는데도 손가락으로 펜을 고정시켜 정성껏 써야 한다. 그런데 한 장 혹은 그 이상의 편지지에 글을 써야 한다니. 그래서 나는 보통 나의 시간과 마음을 온통 할애해도 아쉽지 않을 만큼 소중한 사람에게 쓰곤 한다. 진한 향기는 아니어도 가슴속에 유유히 머무르는 잔잔한 향기처럼 상대를 온종일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서 길면 며칠간의 생각을 정리해야 비로소 완성되기도 한다. 할 말이 많은 관계일수록 차곡차곡 가장 특별한 말들만 모아 마음을 다해 채워낸다. 아름다웠던 추억을 되짚고, 좋은 감정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야 오로지 그 사람만을 위한 글을 쓸 수 있다. 혹여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소중하게 간직하기를 바란다. 하다못해 작은 메모지에 적어준 쪽지라도 가장 비싼 '마음'이 담겨있다.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다.

 
 어릴 때 여러 번 펜팔을 해본 적이 있다. 밤마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편지를 쓴다는 사실이 참 근사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내 단짝 친구도 펜팔과 주기적으로 편지를 주고았는데 그 계기로 호기심이 생겼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유행했던 '체리 우체국'이라는 펜팔 연계 사이트를 통해 만난 사람들과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메일 펜팔을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직접 편지를 주고받는 펜팔만 구했다. 어느 날 우체통에 꽂혀있는 편지봉투를 발견할 때의 설렘과 편지지에 꾹꾹 눌러쓰는 감촉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가장 오랫동안 연락했던 펜팔은 무려 3년 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나보다 6살이 많았던 그녀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부터 누구에게도 해본 적 없는 비밀 얘기까지 주고받았다. 편지의 매력은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는 데 있었다. 카톡은 1이 사라지면, 상대가 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확실히 예전 2g 폰의 문자보다는 재미가 반감되었다. 편지는 문자보다 더 신비하다. 편지가 도착했을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시엔 기상환경에 많이 좌지우지되기도 했고, 또 편지 배송기간이 지금보다 더 길었다. 그래서 내가 편지를 보내고 다시 편지를 받기까지는 길면 한 달까지 소요되기도 했다.

 처음 편지를 보내고 느끼는 짜릿함과 설렘은 시간이 지나 빈 우체통을 확인하면서 점점 무뎌진다. 그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무렵 우체통에 꽂힌 봉투를 발견하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 집에 올라가기도 전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이미 봉투를 뜯어서 읽고 마는 것이다. 그녀는 가을이면 단풍잎 말린 것을 넣어서 줬고, 봄엔 예쁜 꽃잎을 따서 넣었다. 나는 그녀의 편지를 통해 계절이 바뀐 것을 실감하곤 했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은 학생이었고 그녀는 어른이었다. 그녀의 편지는 늘 봉투부터 기품이 흘렀다. 편지지에는 향수인지, 페브리즈인지 모를 기분 좋은 향기가 늘 배어있었다. 언젠가는 나도 그녀를 따라 하고 싶은 마음에 엄마 화장대에 있는 향수를 뿌려서 보낸 적이 있었다.

 열여섯의 나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는데 스물둘의 그녀에겐 어떻게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조금 웃기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나보다 여섯 살이 어린 아이에게 편지를 받는다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다. 그녀도 내게 비밀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나는 그녀의 '이건 정말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에요.' 하는 수식어를 읽을 때면 내가 마치 그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 어깨가 으쓱해졌다. 비밀스럽고, 묵직한 이야기들. 우린 그렇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관계였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중엔 없어선 안 될 관계라고 서로를 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녀의 연락처는 물론이고 행방도 알 수가 없다.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지만, 그녀에겐 가족에 관한 비밀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갑작스럽게 연락이 끊길 수도 있다고 말하곤 했다. 삼 년 간 누구보다도 내 곁에 가까이 있었던 그녀의 답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다시 편지를 보내봤지만 역시나였다. 그때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걱정되어 며칠을 펑펑 울었었다. 무려 삼 년의 시간 동안, 해가 바뀔 때면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주고받으며 성장했던 관계였다. 한순간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내 생애 첫 이별이었다. 남녀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때 생생히 아픈 이별을 겪었다. 그러다 차츰 마음이 무뎌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편지함에서 그녀의 편지를 볼 때면 마음이 쓰라리다. 그리고 주문처럼 외우곤 한다. '언니, 어디에서 뭘 하며 지내시든 항상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온 마음을 다할게요. 언니 정말 고마웠어요. 꼭 좋은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가 잘 지냈으면 좋겠다. 무사히, 고마운 일들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어린 내게 그녀는 호기심의 대상이자 별이었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지금쯤 그녀 곁을 내내 지켜줄 따뜻하고 큰 별 하나가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 밤엔 고마운 사람들에게 말 대신 편지를 써보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안한 사람에게 그 사람을 생각하며 고른 선물과 며칠 내내 정성껏 적은 편지를 주어 마음을 보여주려 한다. 마음은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나는 진심이라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고 알아주길 바라며 외치기보다는 보여줘야 오랫동안 느낄 수 있는 사랑이 된다. 드문드문 당신의 마음에 나의 마음이 스미도록, 나의 사랑과 당신의 사랑이 겹쳐 촉촉이 젖어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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