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자수 문화의 심미감과 정통성, 역사를 전부 다 볼 수 있는 전시회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렸습니다. 근대미술관으로서 특화된 역할을 수행하는 곳인 만큼 전시회의 타이틀도 <한국 근현대 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이라는 타이틀로 19세기말 이후로 제작된 자수 작품들이 나왔습니다. 국내외 60여 기관과 개인이 소장한 근현대 자수, 회화, 자수본 170여 점 그리고 아카이브 50여 점이 출품되었고 오는 8월 4일까지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야 할 점, 즉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자수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고 근대에 여성이 붓을 잡고 그림 그리는 게 어려웠던 시절에 남자 예술가들이 아닌 자수를 전공한 한국 여성들이 위주가 된 활동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 자수 문화에 대한 인식은 의복에서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그저 천에 꿰매는 바느질로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를 통해 미적인 조형감각과 색의 조화등 자수의 예술성이 얼마나 뛰어난지 느낄 수 있고 왜 오늘날까지 훌륭하고 내용이 풍부하며 격조 높은 전통 자수가 이어져 오는지 알 수 있어요.
전시회의 구성을 총 4가지로 나뉩니다.
1.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2. 그림 갓흔 자수
3.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
4.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
1. 백번 단련한 바늘로 수놓고
제1전시실에서는 일상용품을 장식하는 생활자수, 의복을 장식하는 복식자수 그리고 혼례 등 각종 잔치나 의례에 사용되는 병풍과 같은 감상자수가 나옵니다. 옛 자수는 여성이 뽕을 따서 누에를 키워 실을 켜서 꼬고 날염하여 수를 놓는 일련의 과정을 오랫동안 혼자 준비하고 구상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각자마다 개성이 생겼고 고운 염색, 실의 꼬임새등 시각적으로는 물론 촉각적으로도 입체적이며 전통적인 특징들이 고스란히 나타나죠.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제1전시실 전경,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작품들을 봤을 때 제가 느꼈던 점은 옛날 여인들의 고뇌와 시집살이의 고단함 그리고 '예술과 지적 분야 등 공적 세계로부터 차단된 삶 속에서 살아가는 자신들의 마음을 한 없이 쏟아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색질로 표현한 작품들이 매우 섬세했고 미적 감흥과 꿈을 쏟아냈다고 생각하니 자수 작품들을 통해 여인들의 자유로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격식을 따져야 했던 시대라는 점을 감안해서 작품들을 보았을 때 확실히 유교사회이다 보니 주로 조상들에 대한 존경 그리고 행복한 부부 생활을 기원하는 의미를 동물들과 자연을 소재로 표현 한 점이 잘 연출되었어요.특히 한쌍의 새들이 마주 보고 있는 모습과 병풍 두 폭씩 서로 마주 보는 형태가 안정감을 주는 게 인상 깊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새들, 가정의 화목과 행복한 부부 생활을 기원한다는 것을 보여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그리고 제1전시실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회화작품이 있습니다. 작품 이름은 <백화만발>입니다. 자수전시에서 회화작품이 먼저 보이는 게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꽃의 화가'라고 불리는 김종학 작가님은 이 작품을 통해 전통 자수에서 큰 영감을 받아 생명력이 가득한 원색의 꽃과 과감한 형태의 생명체를 표현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하여금 자수와 회화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어서 의미 있는 작품이라 여겨집니다.
백화만발, Acrylic on Canvas, 1998.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2. 그림 갓흔 자수
제2전시실에서는 '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한층 더 발전된 작품들을 만날 수 있고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도쿄에서 유학한 유학생들의 작품활동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작품들은 전통자수와는 성격이 다르고 창의성을 기초로 한 사실주의 자수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어요. 일본에 건너가서 공부했던 자수과 여성들은 고국으로 돌아온 뒤 전국의 여학교 기예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자수를 가르쳤고 새로운 자수들을 보급했습니다.
자수의 영역이 점점 커질 때마다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여성의 지위를 향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제2전시실 전경,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그 당시 어떻게 자수 작품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아카이빙
전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나혜석의 조카 나사균 작가님의 졸업작품 1937년작 '죽계'를 볼 수 있습니다. 가족의 화목을 상징하는 원앙 대신 대나무 속의 닭을 자수로 새긴 정교한 솜씨가 전통자수보다 더 사실적이고 실을 꼬아 쓰는 전통자수와는 달리 가는 가는 실을 써서 윤택한 느낌이 강합니다. 방향에 따라 길고 짧은 실들을 써가면서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는 솜씨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죽계, 비단에 지수, 1937.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박을복, 이정봉 작가님의 작품들도 있지만, 기억에 남았던 작품을 꼽자면 숙명여고보생 공동제작으로 만들어진 '등꽃 아래 공작'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작품들보다 화려해 보였어요. 광택 있는 풍사로 수놓아 부드러운 등나무 꽃잎과 공작의 화려한 꼬리깃털의 질감을 최대한 살렸고 실제 공작새를 보는 것처럼 사실적인 묘사를 가장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학생들이 3년에 거쳐 완성한 작품인 만큼 고뇌와 인내가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등꽃 아래 공작, 비단에 자수, 1939,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이외에도 눈에 들어왔던 작품들은 한국의 광복을 바라는 무궁화 지도 자수작품과 대구공립여고보생 공동제작 '해금강'입니다. '해금강' 작품은 하늘과 강의 부드러운 결을 살린 게 웬만한 유화작품들보다 더욱 사실적이고 강물의 묘한 그라데이션을 잘 살린 게 신기하면서도 대단하게 느껴졌고 무궁화 지도 자수 작품은 나라꽃으로 한국 광복을 염원하는 모습이 같은 한국인으로서 많은 것들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3. 우주를 수건(繡巾) 삼아
제3전시실에서는 우리나라 광복 이후에 자수 작품들과 역사를 만날 수 있습니다. 특징들은 현대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 그리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아마 예상하지 못해서 그럴 수 있지만 자수로 추상화를 표현한 점입니다. 사실 자수에서 추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맞게 간다는 의미로서 동시대성을 가진다는 점이 대단했습니다.
유화에서만 보던 추상회화를 자수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니....
광복 이후 자수의 역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자수과가 생겼고 섬유예술과로 변화하는 과정들을 볼 수 있습니다. 자수의 위상이 엄청 올라갔으며 다양한 재질의 바탕천과 실, 전통적인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계속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자수는 재료와 시간을 낭비하는, 현대화해야 하는 극복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안타깝게도 점차 쇠퇴기가 되었다고전해집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제3전시실 전경,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보였던 작품은 김혜경 작가의 졸업 작품입니다. 자수소재로서 벽난로 불을 쬐며 독서를 하고 있는 여성은 이 당시에는 무척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색감과 자연스러운 그라데이션 그리고 한복 주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선의 디테일이 돋보입니다.
저에게 크게 와닿았던 부분은 한복, 소파 그리고 카펫의 촉감이 느껴질 정도였고, 난로의 온기가 느껴져 작품에서 따뜻함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신기했던 점은 보는 각도와 조명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여서 회화작품에서만 보이는 가변성을 지니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전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 만든 작품 중에서는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정야, 비단에 자수, 1949,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그다음으로 박을복 작가님의 작품인 <표정>입니다. 사실 작가님의 작품은 제2전시실에서도 인상 깊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이 작품이 더 의미가 있어서 제3전시실 파트에서 다루었어요. 자수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를 받을 정도로 대단한 작가님이십니다.
작품을 보면 추상화 느낌이 납니다. 그 당시에 유행하던 피카소의 '큐비즘' 스타일로 화면을 분할했고 현대적인 느낌을 보여줍니다. 작품은 기하학적 추상에 가깝지만, 신체와 얼굴의 부분은 구상적입니다. 여러 가지 기법을 도입해서 화면의 밀도를 높였고 두 폭으로 나뉘어 작업했다는 점에서 실용성도 염두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자수에 '큐비즘' 스타일을 넣었다는 점에서 그당시 트랜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섬세하고 사실주의적인 자수와는 차별성이 있어 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표정, 마직에 자수, 1962,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이 밖에도 제2대 국가 무역 문화재 자수장 최유현 작가님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했던 송정인 작가님의 <벽걸이> 그리고 작품 속 여인의 뒷모습이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작 '안개 속 방랑자'를 연상하게 만드는 이정봉 작가님의 <파도>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제3전시실은 전통 자수를 제작하면서 동시에 시대에 흐름을 맞추어 추상 영역까지 시도했던 당시 자수들 노력을 볼 수 있습니다.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 <파도>
송정인 작가님의 <벽걸이> 그리고 문교부 장관상
4. 전통미(傳統美)의 현대화
제4전시실은 근대 이후로 자수의 현대화를 이어져 오는 게 점점 더 다양하게 커져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교육'과 전시를 통해 미술공예로 이어져 오고 있었다면, 여기에서는 산업화 시대에 국가 경제에 한 부분으로서 산업공예 그리고 여전히 계승해야 할 전통공예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당시 '동양자수'는 수출용 혼수 및 예단용,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념품 그리고 실내장식으로 쓰이는 자수들이 국내외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방색이 짙은 자수는 지방특산물로도 지정이 되었죠.
사실 우리나라 동양자수는 일본풍 자수와 전통자수가 혼합된 자수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로 점점 변화했고 제4전시실에서는 전통자수의 계승과 현대화의 열정과 신념을 지닌 예술가들에 의해 지속되고 공예의 가치를 재고하는데 일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제4전시실 전경,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여기에 있는 작품들은 제가 느낀 바로는 다른 전시실에 있는 작품들보다 조금 더 정제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상 깊었던 작품은 정영양 작가님의 <통일(무궁화)>입니다. 작가님은 자수는 단순한 손기술 또는 노동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이자 자아표현의 매체라고 늘 강조하셨던 만큼 작품에서 무궁화를 통해 통일의 염원을 매우 잘 표현하셨습니다.
작품은 완성되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청와대에서 구입했다고 합니다. 화려한 무궁화 가지를 수놓았어요. 무궁화는 오래 피는 꽃으로 우리나라를 상징합니다. 북한을 나타내는 우측에 붉은색 무궁화와 남한을 나타내는 흰색 무궁화가 한반도 형태로 곡선을 이룹니다. 각각의 꽃은 꼰실을 사용하였고 양감 있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동서양기법의 자수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통일(무궁화), 비단에 자수, 1968,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대망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작품은 가장 끝에 나오는 최유현 작가의 팔상도(八相圖)입니다. 불교적인 성격이 매우 짙은 작품들이죠. 매우 거대한 작품에 압도를 당하는 느낌이 들면서도 섬세하게 불교적인 성격을 표현한 것을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전생의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와 잉태해서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모습과 사문 밖을 나가 노인, 병자, 시체 그리고 고행자를 목격하는 모습을 아주 잘 묘사했고, 설산에서 수도하는 모습, 설법하는 모습 끝으로 사리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까지 석가모니의 삶이 그대로 느껴졌습니다.
사실 저는 사진이나 자수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래서 대부분 다니던 전시회는 설치미술 아님 그림 전시회였기 때문에 자수 전시회는 단순한 호기심이나 관심으로 방문했다가 새로운 시선에서 자수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저 생활용품이나 장식에 쓰이는 게 아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예술의 한 분야라고 느꼈습니다.
요즘은 AI가 글을 써주고 그림도 그려주는 시대이고 그 어떤 시대보다 신속하고 빠르게 결과물이 나와서 자수예술이 미련하고 답답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고뇌와 인내심에서 나오는 창작물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건지 깨닫게 해주는 시간이였습니다.
어쩌면 이번 자수 전시회는 음악이든 그림이든 교묘하고 빨리 사람들 눈에 예쁘고 듣기 좋은 결과물을 내려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한마디를 하고 자수를 통해 많은 시간이 걸리지라도 결국 그 끝에는 진정한 아름다움과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 같아요.
동시대에 한땀한땀 수놓는 수공예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어서 의미 있는 전시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