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이다~~”
“에그~~ 지금 냉이는 무슨 냉이. 못 먹어!”
언니는 그저 반가움의 표현이었을 텐데 엄마는 퉁을 놓으셨다. 발에 밟히는 수많은 냉이들이 먹을 게 못 된다는 것이다. 나도 계속 눈에 밟히는 냉이들이 반가웠지만 못 본 척 산마늘을 뜯으러 돌아섰다.
어느 때부턴가 냉이와 고들빼기, 쑥은 먹기가 힘들어졌다. 아침의 찬 공기와 한낮의 온기가 교차할 즈음 바지런하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밭 가로, 집 오랖도리로 다니며 캐는 것이 되었다. 칠십이 넘은 엄마에게 냉이가 딱 먹기 좋은 철이 오히려 가장 바쁜 철이다. 캐는 건 일도 아니지만 다듬는데 서너 배의 수고가 드는 봄나물들을 캐 먹을 만큼 한가하지 않은 것이다.
하우스에 고추 모판을 만들고 고추 모를 키우고 밭에 거름을 내는 분주한 동안에 냉이는 어느새 세어지고 뻣뻣해진다. 생콩가루 풀어 엄마가 끓여 주던 냉잇국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이제는 내가 냉이를 캐서 엄마에게 맛 보여 드릴만도 할 텐데 그런 일엔 여전히 젬병이다. 그 맛을 그리워하면서도 흙 묻은 손으로 냉이 하나 건네지 못하는 마음이 내내 걸린다.
봄 부추는 보약이라며 언니는 부추를 뜯어 전을 부쳤다. 나는 산마늘 잎을 뜯어 장아찌를 담그는 엄마를 도왔다. 고추 모판에 물을 주고 점심상을 차리는 동안 냉이는 다시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장날이라 오일장에 들렀더니 두릅을 비롯해 온갖 봄나물들이 장마당의 주인공으로 나와 앉았다. 보기만 해도 입맛이 돌고 마음이 푸릇푸릇해진다. 많은 나물들이 하우스에서 재배될지 모르지만 봄의 기운이란 것이 겨울의 찬바람과 인색한 햇볕을 어느 정도는 견디고 나온 것이리라 믿는다.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 김형수의 <문익환 평전>에서 용정과 간도 땅의 긴긴 겨울과 영하 40도의 혹한,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가는 봄과 가을의 풍경을 만났다. 그런 땅에서도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온다. 원해서 간 것도 아니고, 고향 땅에서 살 수 없어서, 가장 척박하고 가장 구석진 곳만이 그들을 받아주었다는 사실 앞에 목 밑이 찡해진다. 그래도 그곳에서도 봄은 왔을 것이다. 냉이는 돋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캐어 국을 끓였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그렇게 초록을 먹는 일이기도 하니까.
발에 밟히는 냉이, 장마당에 넘쳐나는 봄나물들, 마트에, 가게에, 재래시장에도 초록이들의 습격에 한참일 테다. 때를 기다려 씨앗을 틔워내는 초록이들은 모든 생명을 길러낸다. 작은 애벌레부터 곤충들, 날짐승, 산짐승, 가축들, 100년 전 간도의 사람들과 2026년의 우리도 말이다. 봄은 해마다 그렇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