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원 <추억의 생애>를 읽다 쓰다
어릴 땐 내가 똑똑한 줄 알았다. 뭘 듣거나 배우거나 읽거나 할 때 이해 못 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글도 수도 일찍 떼고 책도 이른 나이에 읽기 시작했으며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시험 백 점 받는 것도 아무 문제 없었다.
초등학교 때까진 그랬다는 얘기다. 그리고 몇 년쯤 더 버틸 만했는데 고등학생이 되니 더는 모른 체가 안 됐다. 세상엔 똑똑한 사람이 차고 넘치더라는 거다. 경험이니 관록이니 하는 말로 덮기도 전에 타고난 천재를 반짝이는 이들, 또래 중에도 그런 천재들이 많더라는 거다. 수쯤은 암산으로 풀어버리던 김, 칠판 가득 쓰인 영단어를 한눈에 기억해 옮겨 적던 리, 역사책에 나오는 모든 연도를 외고 있던 최가 있었다.
야구게임에서 강에게 번번이 졌다. 세 자리 숫자를 맞추는 게임인데, 생각해 보니 요령을 몰랐다. 게임에 익숙해지면 저절로 알게 되는 필승공식 같은 거 말이다. 뭐든 익숙해지는 데 더딘지라 셈이 느렸는데, 시시하다고 그만하자는 강의 말에 기가 죽어버렸다. 나는 멍청하구나, 했다. 그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는 핑계를 얻었다. 몰래 보던 책을 대놓고 보기 시작했는데, 교과서만 빼고 뭐든 읽었고 그중엔 박이 쓰는 무협소설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소설을 쓴 박, 영퀴방에서 날아다니던 기, A4 두 장 분량의 레포트를 삼십 분만에 쓰던 원. 이들 천재 앞에서 나는 어느 때보다 작아졌다. 문장 하나 쓰며 세월아 네월아 노래만 부르는 내게 그들의 빠른 손은 기적 같았다. 속도가 다가 아니었다. 내용 또한 흠잡기 어려웠으니, 그때쯤엔 부럽지도 않았다. 그들은 어나더 레벨이었다. 나는 독자로 만족하기로 했다. 글은 이런 사람들이 쓰는 거다... 핑계 목록이 늘었다.
저자의 글을 처음 접했을 때 알아봤다. 그들 중 한 명이구나. 잡학다식하고 상상력 지대하고 글빠른 천재구나. 소년부터 문학력이 터진 박, 온라인 글바닥을 자유비행하는 기, 긴 글을 한 호흡에 적어내리는 원… 이들의 재능을 모두 탑재한 어벤저스구나. 모르는 척 물었다. 정체가 뭐에요? 회사원, 이라는 답이었다. 물론. 클락 켄트도 회사원인 걸.
비밀을 알지만 함구한다. 그가 마음 편히 날아다니며 글을 뿌리고 우울에 빠진 독자들을 구원할 수 있도록. 이크. 그가 <추억의 생애>라는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이로써 사회·문화 현상에 나비 효과적 영향을 미치며 현존하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혹 나보다 눈치가 늦은 이들이 있어 뒤늦게 정체를 알아챘다면, 모른 척 하기로 하자. 우리들의 다정한 이웃을 지키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