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정해져 있다

내가 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착각

by 새벽당직일기

주변의 여자인 친구들이 종종 심각한 표정으로 사주를 보고 온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점집을 갔는데, 이 남자랑 결혼하면 절대 안 된대. 사주가 상극이라나 뭐라나. 나 정말 헤어져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과의 미래를 축복받고 싶어 찾아간 곳에서 오히려 불길한 예언을 듣고 온 친구의 눈빛은 흔들린다. 그 불안한 눈을 보며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렇게 대답해 주곤 한다.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친구는 명확한 해답을 원했겠지만, 이 애매모호한 대답 속에는 우주를 바라보는 현대 과학의 냉혹한 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담겨 있다.


필름은 이미 인화되었다

먼저 '반은 맞다'고 한 이유는, 물리학적 관점에서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강물과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은 이러한 직관을 산산조각 냈다.

이론의 핵심인 '동시성의 상대성'에 따르면, 나의 '미래'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누군가에게는 이미 지나간 '과거'일 수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사건은 4차원 시공간(Spacetime)이라는 거대한 블록 안에 이미 동시에 존재한다.

우주는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라이브 방송이 아니라, 이미 촬영이 끝나 필름 통에 담긴 영화와 같다. 소위 '블록 우주(Block Universe)'라 불리는 이 세계관 안에서, 네가 결혼을 하든 헤어지든 그 결말은 우주 어딘가에 이미 고정된 좌표값으로 존재한다.


0.3초 먼저 도착한 결정

더욱 섬뜩한 진실은 우리 머릿속에서도 일어난다. 친구는 지금 "결혼을 할까 말까"를 자신의 자유의지로 치열하게 고민한다고 믿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신경과학은 이것이 정교한 '착각'임을 증명해 냈다.

벤자민 리벳(Benjamin Libet)의 실험과 이후의 뇌과학 연구들은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정을 내리기 수초 전, 뇌의 운동 피질에서는 이미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라는 전기 신호가 발생한다.

쉽게 말해, 뇌의 신경회로는 물리 법칙과 전기 화학적 반응에 따라 이미 결단을 내렸고, 우리의 자아는 그 결과를 나중에 통보받아 "내가 방금 결정했어"라고 느끼는 후행적인 착각을 할 뿐이다. 우리는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뇌라는 자율주행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는 승객에 가깝다. 그러니 내가 내 운명을 정한다는 믿음은 환상이며, 운명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주의 대전제는 반박하기 어렵다.


누구도 훔쳐볼 수 없는 시나리오

그렇다면 사주가 '반은 틀린' 이유는 무엇인가? 운명이 우주 속에, 그리고 뇌 속에 정해져 있다면 점술가의 예언을 따라야 하는 것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결정론(Determinism)'**과 **'예측 가능성(Predictability)'**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것과 그것을 인간이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인간의 뇌에는 약 860억 개의 뉴런이 있고, 우주에는 셀 수 없는 입자들이 상호작용한다. 이 거대한 복잡계는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의 지배를 받는다. 초기 조건의 아주 미세한 차이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내는 '나비 효과' 때문에, 현재 상태를 소수점 아래 무한대까지 측정하지 못하는 한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다.

태어난 연월일시 고작 여덟 글자(사주팔자)로 이 천문학적인 변수들을 계산하여 4차원 블록의 뒷부분을 엿본다? 그것은 오만이다. 미래를 시뮬레이션하기 위해서는 우주 그 자체만큼 거대한 컴퓨터가 필요하다. 즉, 미래를 미리 아는 유일한 방법은 그 시간을 직접 살아보는 것뿐이다.


결말을 모르는 관객의 특권

우주라는 4차원 블록 안에 우리의 탄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은 이미 조각되어 있을 것이다. 리벳의 실험이 증명하듯, 우리의 의식은 그 조각된 길을 뒤따라가는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우주의 해상도는 인간의 지성을 아득히 초월한다. 나비 효과가 지배하는 이 복잡계에서 사주팔자라는 빈약한 알고리즘으로 미래를 해킹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봉인되어 있다. 우리는 그 봉인을 뜯을 수 없기에 역설적으로 자유롭다.

결말을 아는 관객에게 영화는 지루한 확인 작업일 뿐이지만, 결말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매 장면이 경이로운 모험이 된다.


친구여, 엉터리 예언서로 스포일러를 당하려 애쓰지 마라. 너는 그저 이 거대한 시나리오를 모르는 채로, 가장 경이롭게 관람할 특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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