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왕가위
‘됐어요 아가씨 치수는 제가 잘 알아요 그냥 손으로 잴게요’
좋은 감독을 포함한 여러 창작자에게 매력적으로 느끼는 부분을 왕가위 감독에게서도 똑같이 느낍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이전 작품들에서 인상적이었던 것들이 ‘에로스’에서도 같은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볼륨이 작은 작품이라서인지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인한 변화인지는 몰라도 ‘중경삼림’이나 ‘화양연화’에서의 과감함을 조금 덜어내고 조금 더 심플하게 다가가려고 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에로스’라는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두 차례에 성관계 장면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소리와 사물을 중심으로 고정되는 앵글들로 표현하며 다음 컷에는 장이 건조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 대신에 장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성적 페티시를 왕가위 감독 특유의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 안에 담습니다. 그녀가 만들어준 주먹밥을 군대도 아닌데 왜 화장실에서 그렇게 야릇하게 먹어야 하는지 또 그녀가 입었던 옷을 수선하면서 흥분하는 장면들을 바라보며 장에 감정선을 함께 따라가다 보면 이뤄지지 않는 그의 욕망과 사랑에 연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인지는 표기되지 않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 살이 빠져서 다시 치수를 재야한다는 말에 장은 후아에게 말합니다.
‘됐어요 아가씨 치수는 제가 잘 알아요 그냥 손으로 잴게요’
라는 말을 마치자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이처럼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서 감정에 극단을 관객에게 이입시키는 방법은 대사보다는 음악과 그 음악을 따라 흐르는 영상이기도 합니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의 의미는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초라해진 자신의 처지에 대한 감정인지 장에 대한 미안함인지. 이야기에 끝에 다다르자 영화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옵니다.
아픈 그녀를 걱정하는 장에 대사부터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끝나는 장이 가지고 있는 성적 페티시까지 길지 않은 러닝타임으로 군더더기 없이 담아냈습니다.
그녀는 무슨 병에 걸린 건지 그리고 장에 마지막 초췌한 얼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물음으로 남겨두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시작도 없이 끝나버리는 사랑들이 우리 곁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랑한다는 말은 늘 너무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