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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울 Dec 27. 2023

2.5번째 이순신 영화

<서울의 봄>, 그 분노의 원천은 어디인가.

 [왜 그렇게까지 분노하는가?]

 <서울의 봄>, 참으로 반어적인 제목이다. 궁정동에서 박정희의 기나긴 독재가 종지부를 찍은 후 민주화의 봄이 올 줄 알았던 시민들은 또다시 기약없는 독재의 겨울을 지내야 했다. 집권 이후의 행보를 배제하더라도 반민주적 군사쿠데타라는 소재 자체가 전두환에 대한 관객들의 분노를 이끌어내는 소재였다. 그러나 관객들 사이에서 심박수 챌린지가 유행하고, 전두광을 연기한 황정민이 고문당하는 영화를 찾게 되는 현상은 어딘가 이례적이다.

[단순한 선악구도, 그 속에 있는 것]

 전두환은 어떻게 보면 악역으로 그리기 가장 쉬운 인물이다. 모든 정치인이 공, 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과로서만 평가받는 인물이지 않은가? 장지마저 분양받지 못한 그를 악역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비판이 일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의 전두환 묘사는 낯설다. 진중한 분위기의 장성들 가운데에서 어딘가 방정맞아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전두광을 장군보다는 조직폭력배로 보이게 한다. 하나회의 다른 인물들마저도 보통의 인물로 그려지는 상황에서 전두광만을 그렇게 묘사하는 것은 한편으로 노골적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전두광의 캐릭터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쿠데타에 성공한 후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웃는 모습일 것이다. 전두환을 소위 ‘코리안 조커’로 그렸음이 이 장면에서 드러난다. 전두환을 전두광으로 개명할 때 狂자(실제로는 光자를 사용했다)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그와 대비되는 인물인 이태신. <제 5공화국>에서 유학성에게 호통치는 장면으로 전설이 된 장태완을 각색한 인물이다. 전두광과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전두광과 정 반대로 표준어를 차분하게 구사하는(그리고 풍성한 머리숱을 가진) 이태신의 모습은 그가 전두광과 대립할 것임을 직감하게 한다. 수경사령관을 맡아달라는 정승화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는 모습은 어딘가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선악의 구분이 명확한 서사에서 그런 연출이 문제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낯선 부분에는 항상 숨겨진 게 있는 법이다. 영화에서 전두광이 코리안 조커로 묘사된다면, 이태신은 무엇으로 묘사되는가?

 [국민적 영웅의 배드엔딩]

 장태완의 이름이 유독 많이 개명된 이유는, 이태신이 그만큼 각색되어 만들어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대중영화는 대중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이태신은 대중이 원하는대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이태신의 이름은 이순신 장군을 연상케 하고, 결정적인 장면마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상이 프레임에 잡힌다. 그가 굳이 수경사령관 자리를 거절한 것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생각된다. 무력하게 도망치는 국방장관과 시종일관 무능한 모습만을 보이는 국방부 벙커의 장성들 또한, 임진왜란 당시 도망친 선조와 속절없이 일본군에 당하기만 했던 무능한 장수들을 연상케 한다(임진왜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필자의 사견과는 거리가 멀다).

 패배의 주인공이 국민적 영웅을 투영한 대상이라는 점은 관객들이 분노를 이끌어내기 충분했다. 영화에서 이태신과 이순신은 사실상 동일시된다. 그는 단 한 번도 사리사욕을 추구한 적 없고, 죽으나 사나 오직 나라(=백성)만을 생각한 인물이다. 다른 수많은 명장들을 제치고 이순신이 국민적 영웅에 등극한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패배라는 플롯만으로 이만큼의 분노를 설명하기엔 여전히 충분치 않다.

 [유난히도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

 팀 게임에서 패배하고 사람들이 분노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무능한 팀원때문에 패배했을 때, 그리고 상대방이 ‘인성질’을 시전했을 때다. 영화는 국방부 벙커를 헌납하고 수경사로 모여든 장성들의 모습과 포격을 멈추라고 지시하는 국방장관의 모습, 그리고 거울을 보며 미친 듯이 웃는 전두광의 모습을 통해 위의 두 가지 경우를 모두 연출한다. 국민적 영웅의 패배라는 스토리가 분노라는 요리의 메인 재료라면, 위의 두 가지는 요리의 맛을 극대화시키는 향신료와 같다. 전두환을 소재로 한 콘텐츠에서 이만한 분노가 표출되는 것은, 전두환에 분노하도록 설계된 모든 주변 장치들에 관객들이 오롯이 몰입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객들은 허술하게 설계된 영화에는 온전히 몰입하지 못한다. 역사 영화에서 고증오류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영화가 관객들을 몰입시키지 못했다는 것과 같다. 고증에 목숨을 거는 역사덕후들 또한 잘 만든 영화에선 고증오류를 짚어주는 선에서 그치지만, 못 만든 영화에선 고증 오류를 비판하거나 그에 분노하기까지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분노하는 관객이 이토록 많은 것은, 그만큼 영화가 여러모로 잘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천만 영화라는 타이틀을 갖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영화가 끝난 후]

 많은 콘텐츠에서 이순신은 항상 승리하는 장군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이태신은 승리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태신을, 과연 구국의 영웅 이순신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이순신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무패신화의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니다. 전라좌수사 취임 전의 그의 행보는 공직자로서 가장 모범적인 것이었다. 우리는 왜 이순신에 열광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순신의 실패’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어느 시대건 사람들은 항상 이순신의 재림을 바란다. 그들은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비타협적 정의, 애민, 청렴 등 온갖 긍정적인 가치들을 투영한다. 영화는 이 국민적 열망을 처참히 짓밟는다. 그렇기에 이 패배는 단순히 전투에서 패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는 탐욕, 부패, 폭력 등 온갖 부정적인 가치들에게서 패배하는 것과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사진 촬영 씬에서 관객들은 영화에서 느낀 분노를 현실로 끌고 오게 된다. 현실이 실제로 어떤지와 상관없이 영화의 암울한 내용이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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