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맛은 어디에서 나는 것일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by 어니

좋은 이야기일수록 알맞은 형식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야기를 담을 그릇이 소설이면 왜 소설이어야 하는지, 희곡이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또는 영화라면 왜 꼭 영화여야 하는지. 난 사실 영화에 대해선 잘 모른다. 뭐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내가 문학을, 연극을, 영화를 자꾸 더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뭘 잘 모르고 봐도 설득되는 경험들 때문이다. 아, 이 이야기는 이런 형식이 필요했구나. 이렇게 표현되어야만 했구나, 하는 것들. 그런 경험이 주는 만족과 어 이거뭐지뭐지, 하면서 눈꺼풀이 벗겨지는 충격감 같은 것들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왕과 사는 남자>는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좋고, 그래서 아쉬웠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와 연출, 영상미의 다소 촌스럼?과 산만함? 단순함?을 뚫고도 뛰쳐나오는 이야기의 힘이 느껴졌달까. 어떻게 하면 더 잘 찍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그냥 좀 견디면서 봐야 했고 무슨 얘길 하고 싶은지 잠깐 정 줄 놓으면서(영화 두 편 연달아봤음) 기다려야 했단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연기 차력쇼가 너무 안타까웠음)


그런데도, 좀 어설프고 힘조절도 잘 못하고 세련미는 떨어지더라도 어떤 이야기는 기술적인 것을 다 뛰어넘어서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좀 초점이 나가면 어떻고 말 좀 띄엄띄엄하면 어떻나 싶기도 하다. 아무도 안 해본 얘기, 내가 전에는 안 해본 얘기를 한다는 게 중요한 것 아닐까? (이건 내가 창작자에게 가진 너무 후한 마음 때문일까?)


영화는 역사의 한 장면에 한컷 줌인해 그곳에 상상을 더해 우화 같은 공간을 만들어냈다. 유력자가 탈수도, 탈중심 해서 주변세계에 도달할 때 일어나는 다이내믹에 대한 상상이다. 처음에 그것은 마찰로 보이지만 점차 구성원 간 상호 변화를 가져온다. 서로 이런저런 모양의 불균형을 이루는 사람들이 뒤엉켜 살아가는 것이 사회이다. 지식과 힘, 소유와 재능, 신체능력과 심지어 인지능력도. 어쩐지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사람들의 역량과 조건이 다 똑같아지는 것을 지향점으로 삼는 것 같다. 아이에겐 다 성장한 어른과 같은 조절 능력을 요구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에겐 일 잘하는 것, 상황판단 빠른 것, 행동이 빠릿빠릿한 것, 뭐가 됐든 사회가 지금 이 모양인대로 계속 잘 굴러갈 수 있게만 하는 어떤 인간상에서 벗어나면 온갖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영화 속으로 들어가면 일단 상황이 극단적으로 설정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상상이 가능해진다. 지리적으로 너무 구석이라 세상과 일면 차단된 광천리라는 역사적 상상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힘의 소유자들이 함께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중심지의 정치적 역학에서 강제적으로 몰려난 소규모 공동체에서 이런 충돌, 이런 공존은 어떤 의미가 될까?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 알면 알수록 그것 자체로 각 구성원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은 왜일까? 병약해 보이던 왕족에게 기개가 있다는 것, 가난해 보이는 이들에게는 사실 자연세계와 실생활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손재주가 있다는 것. 나와 다른 타인을 목격하는 순간 자동으로 사람들 안에서 무언가 변화가 시작된다.


영화 속 광천리는 ‘돌봄을 중심으로 삼는 공동체‘라는 일종의 사고 실험으로 볼 수 있을까. 우리 사회 중심 가치에, 정치의 중심 사상에, 교육의 핵심 목표에 ‘상호 돌봄’이 있다면? 구성원 간의 불균형을 더 자세히 알고, 불균형한 힘의 사용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도움과 돌봄과 의존이 필요하다는 것이 모두에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서로를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있다. 역사의 구석 페이지를 뒤져 마음껏 상상하고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표현해 보는 것, 그냥 그런 데서 감동이 있고 또 한편으론 용기를 얻게 되는 영화였다.


그나저나 유배지라는 것…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 같다. 유배지에서 정말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저술, 양성, 정원 가꾸기, 농작물 기르기 등등등. 시대니 신분, 상황 다 떠나서 이홍위가 물에 빠지는 초반 장면에서, ‘살면서 강에도 한번 빠져봐야 제맛 아니냐?’ 이런 생각을 했다. 어떤 비참은 비참으로 안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신기하다. 살 맛은 어디에서 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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