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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 있는 노력이라는 물방울

by 어니

1월 중순에 논문 하드카피를 도서관에 제출하고 박사 프로포절 드래프트를 작성해서 보내고 나서, 겨울 내내 완전히 책상 앞을 떠났다. 엄밀히 말하면 전공 관련 책, 논문, 내가 쓴 글들로부터 떠났다. 그 어느 것도 거들떠보기가 싫었다. 이사를 하면서 생긴 팬트리에 작은 서고 같은 것을 만들었는데, 구약학 책들을 다 거기에 넣어버렸다.(그래도 양심적으로, 제일 손 잘 닿는 칸에.) 거실로 밀려난 내 책상 옆 책장에는 누가 봐도 내 전공을 알 수 없는 책들만 꽂아두었다.


이러면서 내내 마음이 불편한 것은 ‘다음 단계를 향해 계속 정진’ 해야 한다는 정답 같은 것이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지원을 하려면 프로포절을 더 다듬어야 하고 그러려면 방법론을 위한 독서부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매우 수고스런 본문 관찰까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구만리다. 그렇지만 도저히 그 어떤 것에도 착수할 수가 없었다.



겨울 동안 나는 때늦은 방황 같은 것을 했다. 앞으로 무얼 하며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인생이 뭐지, 난 누구지 이런 생각에 눈 뜨고 잠들었다. 해야 하는 일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손 가는 대로 문학, 철학 책만 들입다 읽어댔다. 독일문학에 빠져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독일어 원서를 구해서 오후 내내 문장들을 대조해 보고 해석하면서 그게 그렇게 짜릿하고 재밌었다. 이제 와서 못 이룬 문학도의 꿈을 다시 펼쳐봐? 하는 생각도 했다. 학부 때 호기롭게 매 학기 프랑스문학 전공수업 기웃대다가 꾸준히 성적표에 비가 내리고 씨를 뿌렸는데…. 내 안에 있는 삶과 실존에 대한 질문들, 사회와 세상을 보며 고민하고 갈등하는 갈증을 파고들기에 성서학이 평생 붙들고 싶은 연구대상이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오전과 낮엔 그렇게 읽고 싶은 책만 읽고, 아이들이 집에 온 오후에 주말엔 오롯이 아이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다.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박물관과 과학관에 가고, 애들 데리고 또 도서관에 가고…. 이제 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를 위해 처음으로 학습 계획을 세워보기도 했다. 영어 오디오 자료를 정리하고, 한창 독서량이 늘고 단어 뜻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에게 한자를 가르치려고 학습지도 알아봤다. 그러면서 오랜만에 온전히 엄마로 지내는 보람과 즐거움이 달콤했다. 아쉬움이나 조급함 없이 아이를 대할 수 있는 여유, 아이의 24시간을 지켜보며 전보다 깊어지는 친밀감이 좋았다. 이대로 그냥 ‘엄마’로서 공백 없이 아이들 옆에 있는 것도 좋은 인생이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가 긴 겨울방학의 마침표를 찍는 이번 연휴, 지난겨울이 내게 슬로우 시즌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 잃은 것처럼 정리되지 않는 이 생각 저 생각만 쌓여가던 와중 3일이나 주어진 휴일에 또 여러 책을 쌓아두고 읽고 있었다. 그중에 칼 뉴포트의 Slow Productivity라는 책이 있었는데 우연히 읽은 이 책에서 나를 많이 돌아보게 되었다. 뉴포트는 이 책에서 지식 노동자들의 번아웃증후군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지적 노동자들이 사실은 진짜 생산성이 아니라 단지 업무를 많이, 끊임없이 하는 ‘유사생산성’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한때 수렵채집을 하거나 재래식 농업에 종사하는 인류에게 있어 그들의 노동에는 언제나 계절성이 있었다. 일을 해야 하는 때가 있고 기다려야 하는 때가 있으며, 몰입해야 하는 때가 있고 비워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 인류에게 익숙해져 온 노동방식이라는 것이다. 지식 노동이라고 해서 기계처럼 노력과 시간을 투자한다고 언제나 가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뉴포트는 진짜 Productivity란 계절의 흐름처럼 자연스런 일의 흐름을 찾는 ‘Slow Productivity’이라는 철학을 말한다.

돌아보면 석사논문을 쓰는 과정은 내게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논문 한편을 완성하기까지 밟아야 하는 각 단계들을 지날 때마다 매번 시간 기한을 못 지키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내가 세운 기한들이었는데, 예를 들어 구문론 분석이라던지 연구사 정리라던지 내가 어떤 작업을 해내는데 드는 시간은 내 계획보다 늘 오버되기 마련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과제의 난이도와 밀도와 상관없이 나는 항상 너무 오래 앉아있고, 스스로에게 너무 기계적인 결과치를 기대하곤 했다. 나에게는 그보다 더 방대하고 더 깊이 들어가야 하는 박사과정을 시작할 에너지가 남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석사논문 끝났으니 곧장 바로 다음 연구주제 구상이라는 새로운 과업에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미 소진된 내 몸과 마음은 이전 과업의 결과와 의미를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로 피곤과 불만족과 부담이 마구 뒤엉킨 채로 본능적으로 일 자체를 거부하는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뉴포트는 스스로의 결과물을 위해 자율적이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수많은 창작자, 학자, CEO들의 사례들을 들려준다. 내게 특히 위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의 실패 사례들이었다. 뉴포트는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위해서는 취향과 안목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며, 무언가를 계속 시도해 나갈 때 자신의 실패를 통해 무엇이 훌륭한 것인지에 대한 안목이 생겨나고 그 괴리를 좁히고 싶은 열망이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정말 좋은 결과와 도약을 위해 천천히 오랜 시간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리 퀴리는 정말 중요한 연구를 앞두고 어린 딸을 데리고 시골로 가서 몇 달을 보내며 머리를 비웠다. 제인 오스틴은 집필을 위해 당시 사회의 사교적 책무와 가사 일로부터 고립된 공간을 확보했다.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주얼은 더 좋은 뮤지션으로 성장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해 거액의 음반 계약을 거절했다. 뉴포트 자신은 자기 분야에서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보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다른 분야에 몰두해 영화 이론을 공부했다.

내가 괴롭고 의욕이 떨어지고 모든 걸 다 비우고도 싶었던 이유는 내가 진심이었기 때문이며, 하기 싫었던 이유는 사실은 잘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계절은 단순히 말하면 그냥 시간의 흐름이다. 인생의 어떤 시즌은 잠시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고, 시간이 흐르면 일어서서 다시 나아가야 하는 때가 오기도 한다. 대단한 업적을 이룬 누군가의 삶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없이 주저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하는 반복일 것이다. 돌아보면 내게도 그런 늘 그런 느림과 진전의 연속이 있었다. 때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은 시간도 새로운 관점과 의미,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내게 성서학은 어떤 직위를 얻기 위한 관문도 아니지만, 그 자체로 궁극적인 탐구 대상도 아니다. 내게 성서학은 인간 삶에 대한 이해, 어떤 역사의 근원에 대한 이해를 길어 오르는 우물이다. 그럼으로써 내가 궁극적으로 탐구하고 싶은 것은 가장 인간다운 삶, 다른 말로 한다면 선한 삶이다. 그리고 인간다운 삶들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할 내일의 방향이다. 내가 탐구하고 싶은 길에 여전히 성서학이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내 손에 맞는 도구일지는 아직도 확신이 없다. 적어도, 내가 발견해야 하는 길이 아주 먼 길이라는 것, 오래가려면 긴 호흡을 가져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개학의 계절 3월에 몇 년 만에 내 개강이 아닌 3월 첫 주를 맞는다. 익숙한 개강의 긴장 대신, 내 아이의 입학이라는 낯선 설렘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지난 내 시즌의 의미를 조금 알게 된다. 봄이 오면 눈이 녹는 것처럼, 계절의 신비이다. 아마도 힘껏 몸부림치고 길을 ‘잘’ 잃어보려고 애써서 얻게 된 깨달음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내가 진짜 무얼 하고자 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명쾌한 답은 없다. 그래도 다시 책상에 앉을 평정심이 차츰 돌아온다. 길이 어디로 나있는지 미리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지금 하고자 하는 것들을 해보려 한다.


하지만 사실 나는 언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온종일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이 짓을 일주일에 엿새씩 계속하다 보면 매일 조금씩 양동이에 물이 몇 방울씩 채워져요. 그것이 관건입니다. 매일 양동이에 한 방울씩 떨어뜨리면서 365일을 보내면 양동이에 어느 정도 물이 차기 마련이니까요.

- 존 맥피의 인터뷰 중에서. 칼 뉴포트, <슬로우 워크(Slow Productivity),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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