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제의 흙길, 기억의 첫 장

by 김작가a


제1화 연제의 흙길, 기억의 첫 장

연제. 이 이름은 단지 지명 그 이상이다. 내게는 유년기의 배경이자, 인생의 출발점이며, 사라진 시간을 불러오는 마법의 단어다. 흙먼지가 일던 골목, 함석지붕 위로 튕겨 나가던 빗소리, 시장 끝에 앉은 할머니들의 수군거림—all of it.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우연히 아닌 듯, 노무현도 그곳에서 자랐다. 동갑내기이면서, 동네 친구는 아니었지만, 같은 하늘을 보며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랐다.

우리가 함께 지나온 골목

1950년대 후반. 전쟁의 그림자가 조금씩 걷히고 있던 부산, 연제구. 우리는 물자가 부족한 시절, 국밥보다 밀가루가 흔하던 시절,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며 자랐다. 개천가에서 고무신을 잃어버리고 울던 날도 있었고, 시장 어귀에서 팥죽을 훔쳐 먹다 들켜 혼났던 기억도 있다.

어느 날 학교 가던 길에 마주친 소년 하나가 유독 똘똘해 보였다. 교복의 단정함보다 눈빛이 먼저 다가왔다. 후에야 알았지만, 그는 노무현이었다. 말이 많았던 기억도, 말이 많아서 싸움이 붙던 기억도 선명하다. 그는 늘 논리적이었고, 나는 감정에 치우쳤다. 그런 차이가, 어린 시절부터 드러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친구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함께 놀거나 이야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시대를 살았다는 건 단순한 우연 이상의 공명이 있다. 그는 연제에서 자라며 질문하는 아이가 되었고, 나는 연제에서 자라며 글을 쓰는 아이가 되었다.

이름이 뉴스에 등장했을 때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각자의 길로 흩어졌다. 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신문사에 들어갔다. 그는 법대를 가지 않았지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인권변호사가 되었다. 내 눈앞에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8년 청문회 방송이었다. "노무현 의원이요, 오늘 질의가 아주 날카롭던데요." 데스크에서 흘러나온 말에 나는 귀를 기울였다.

TV 화면 속 그는 내가 기억하던 말 많던 소년과는 달랐다. 단단했고, 정중했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방송이 끝난 후 집필 노트에 조용히 적었다. “노무현, 연제 출신.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 질문을 던지는 사람.”

그 뒤로 나는 그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부산에서 내리궈진 선거의 벽, 지역주의에 맞선 그의 도전, 패배에도 좌절하지 않던 그의 눈빛. 동갑내기의 투쟁을 기록하는 일은 내게도 곧 나를 기록하는 일이었다.

봉하마을과 부엉이 바위

그리고 2009년 5월 23일. 그날 아침, 나는 데스크에 앉아 있었다. 동료 기자가 휴대폰을 들고 다급하게 내게 달려왔다.

“김 선배, 노무현 전 대통령이… 투신하셨답니다.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순간 나는 말문이 막혔다. 몇 초간 침묵이 흘렀다. 심장이 멎은 줄 알았다. 우리가 함께 지나온 연제의 흙길이 떠올랐고, 그의 걸음과 내 걸음이 나란히 겹쳐졌다.

뉴스 특보가 이어졌다. “오늘 오전 6시 40분경, 경남 김해 봉하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TV는 차분했고, 사회는 침통했고, 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나는 펜을 들 수 없었다. 모든 문장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단지 그의 마지막이 너무 조용했기에, 오히려 더 크고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날 오후 바로 봉하마을로 향했다. 바위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흙냄새와 풀잎의 마른 숨결, 그리고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던 그의 사진. 연제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인생이 그곳에서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바람에 지워지지 않았다.

왜 그를 기록하는가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 생각한다. 나는 왜 그에 대해 쓰고 있는가? 단지 유명해서? 역사에 남았기 때문에? 아니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고뇌와 외침이 내 가슴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선택한 길, 그가 남긴 말, 그가 바라본 시민과 민주주의.

연제에서 자란다는 건 단지 지리적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결이자 시선의 뿌리다. 그는 그 뿌리에서 성장했고, 나 역시 그 뿌리에서 기록하고 있다. 동갑내기로 살아온 삶의 동선들이 이제 글로 다시 교차한다.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나는 작가가 되었다. 그는 퇴임 이후 마늘을 심었고, 나는 그의 흔적을 글로 심는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보다, 그의 삶을 되새기고 싶다. 그는 연제의 흙길에서 출발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지금 글을 쓰고 있다.

첫 장을 마치며

이 시리즈는 그의 정치적 행보만을 다루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선택, 그리고 동시대인의 공명을 다룬다. 그리고 제1화는 그의 출발점이자 나의 출발점인 연제에서 시작해야 했다.

나는 글을 마친다. 그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질문을 품고, 그 질문을 문장으로 남기는 일은 가능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연제의 흙길에서 이렇게 적는다.

“당신은 이 길을 먼저 지나갔고, 나는 이제 당신을 따라 걷는다. 같은 시대, 같은 고통, 같은 질문. 그리고 지금, 같은 기록.”

화, 목,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