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러나 그의 어깨 위에는 단순한 지게가 아닌, 50명 대가족의 생존이 얹혀 있었다. 새벽이면 산을 오르고, 해질 무렵이면 시장을 내려왔다. 그는 나무를 팔고, 짐을 나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의 손에는 펜 대신 굳은살이 박혔고, 학교 대신 시장이 그의 배움터였다. 그에게 배움이란 생존의 기술이었고, 희망은 증조부의 유산이었다. 의병의 후손으로서 해방 후 독립운동가 가문의 명예를 되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는, 그를 버티게 한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해방은 조부에게 자유가 아닌 또 다른 억압이었다. 친일파가 권력을 잡은 시대, 조부의 가문은 오히려 감시와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로부터 토지를 빼앗겼고, 명예는 지워졌으며, 삶은 점점 더 궁핍해졌다. 그가 힘겹게 일군 밭과 집은 어느 날 갑자기 ‘행정조치’라는 이름 아래 몰수되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서류 한 장, 도장 하나로 조부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는 항의했지만, 돌아온 것은 “국가를 믿으라”는 말뿐이었다.
조부는 끝내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 병든 몸을 이끌고도 가족을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던 그는, 평생 동안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다. 부산법원과 부산시청 부지로 제공된 땅은 그의 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이었고, 그 공여는 종친 형제 김재규가 3군단장으로 부임하는 데 결정적 기여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공로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았고, 필자인 나는 수십 년간 국가를 상대로 소송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조부는 단지 생계를 위해 지게를 졌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 싸운 한 명의 시민이었다. 종친 형제였던 김재규가 졸속 재판 끝에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을 때, 조부는 그 죽음을 3개월간 애곡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조부는 조용히 귀천했다. 그의 죽음은 기록되지 않았고,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지워졌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나 ‘민주시민’이었다. 그의 삶은 단지 한 가문의 비극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는 침묵하지 않았고, 외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지게를 놓지 않았다. 그의 굳은살 박힌 손은 정의를 향한 의지였고, 그의 발자국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이었다.
조부의 삶은 단지 한 가문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의 민낯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해방 이후 친일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오히려 배척당했다. 정의는 침묵했고, 진실은 묻혔다. 김성태의 시국논평에서도 지적되었듯, 광복은 단지 외세의 철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해방 이후의 진정한 과제는, 식민 지배에 협력했던 세력의 청산과 역사 정의의 회복이다.
나는 조부의 삶을 기록한다. 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한 사람의 목소리를 남기기 위해서다. 이 기록은 복수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이고, 책임이며, 미래를 위한 약속이다. 우리는 조부의 삶을 통해 묻는다. 해방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정의는 왜 침묵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다음 회에서는 조부의 죽음 이후, 가족이 다시 연제구로 돌아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기록자’가 되었는지를 다룰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