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해탄의 어둠에서 시작된 여정 — 김대중과 이희호의 삶과 투쟁
김대중은 바다를 건너는 사람이었다.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는 수차례 죽음의 문턱을 넘었고, 그때마다 바다를 건넜다. 1973년 8월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된 그는 눈을 가린 채 고깃배에 실려 현해탄을 건너고 있었다.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 내에서 벌인 작전이었다. 국제법을 위반한 납치였다. 그는 죽음을 직감했다. 바다에 던져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일본 정부와 미국의 압박, 국제 사회의 비난 속에서 그는 서울로 송환되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감시, 협박, 그리고 또 다른 투쟁이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길을 함께 걸은 사람이 있었다. 이희호. 그녀는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동지”라 불렀고, 그녀는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우연 같았지만, 필연이었다.
1951년, 한국전쟁의 한복판. 부산 피란지에서 김대중은 이희호를 처음 만났다. 해운업을 하던 김대중은 피란민을 실어 나르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이희호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여성운동가였다. YWCA 활동을 통해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있던 그녀는, 부산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김대중을 만났다. “아는 것이 참 많은 남자”라고 느꼈고, 김대중은 “이지적이고 활달한 여성”이라 생각했다. 이상하리만큼 말이 잘 통했다. 그러나 그때 김대중은 유부남이었다. 짧은 만남은 서로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 인연은 몇 년 뒤 다시 이어졌다.
1960년, 4·19혁명 이후 김대중은 야당의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대중 연설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고, 정치적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이희호는 명동 YWCA에서 활동 중이었다. 어느 날, 김대중은 그녀를 찾아갔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시국과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5·16 쿠데타 직후였기에 군부의 혁명공약에 대한 의견도 나눴다. 김대중은 쿠데타 세력의 정체를 꿰뚫고 있었고, 이희호는 그의 통찰력에 감탄했다. 그녀는 “이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해 겨울, 김대중은 병을 앓았다. 이희호는 그가 모습을 보이지 않자 걱정했다. 김대중은 자리에 누워 그녀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결국 그는 고백했다. “사랑합니다. 희호씨.” 그녀는 놀랐지만, 마음은 이미 그에게 향해 있었다. 주변에서는 결혼을 뜯어말렸다. 두 아이가 딸린 홀아비에 빈털터리.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는 큰 인물이다. 사람 하나만 보려무나.” 결혼 일주일 전, 그녀는 김대중을 아버지에게 데리고 갔다. 아버지는 한참을 바라보다 말했다. “그래, 잘 살아라.”
1962년 5월 10일, 두 사람은 서울 종로구 체부동의 외삼촌 집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대중은 38세, 이희호는 40세였다. 백금반지를 나눠 끼고,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결혼 후 그들이 들어간 곳은 김대중이 살던 서대문구 대신동의 전셋집이었다. 시어머니와 두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결혼 열흘 만에 김대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죄목은 ‘반혁명’. 그렇게 시작된 민주화 운동가와의 동행은 가시밭길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와 맞붙었다. 전국을 누비며 유세를 벌였고, 박정희는 긴장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의 승리였지만, 김대중은 40% 이상의 지지를 얻었다. 그것은 단순한 패배가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보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혹독했다. 선거 직후,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는 다리를 심하게 다쳤고,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1973년 도쿄 납치 사건 이후, 김대중은 국내에서 활동이 제한되었다. 그는 감시를 받았고, 연설은 금지되었으며, 언론은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글을 썼고, 외신과 접촉했고, 국제 사회에 한국의 현실을 알렸다. 이희호는 그 곁에서 묵묵히 지켰다.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그녀는 난방을 끄고 냉방에서 기도했다. “남편이 추운 감방에서 떨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따뜻하게 지낼 수 없었다.” 그녀는 세탁물을 손빨래하고, 속옷과 양말까지 다림질해 향수를 뿌려 들여보냈다. 그녀의 편지는 엽서 한 장에 1만 4천 자를 써서 보내기도 했다. 확대경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였다.
1980년, 광주. 전두환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고, 계엄령을 확대했다. 광주 시민들은 이에 저항했고, 군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김대중은 그 중심에 있었다. 그는 광주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나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미국의 강력한 압박과 국제 사회의 여론 속에서 그는 사형을 면하고,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그는 다시 망명자의 삶을 시작했다.
미국에서 김대중은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민주주의의 대변인이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강연했고, 워싱턴에서 의원들을 만났으며, 유엔에서 한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외롭지 않았다. 세계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망명 중에도 한국의 상황을 면밀히 파악했다. 그는 동지들과 연락을 유지했고,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그는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1985년, 그는 귀국했다. 공항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다시 투쟁의 중심에 섰다.
1987년, 6월 항쟁. 전국적인 민주화 요구가 폭발했다. 전두환 정권은 결국 직선제를 수용했고,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김대중은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김영삼과의 단일화를 위해 양보했다. 그러나 단일화는 실패했고,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그는 다시 도전했다. 1992년, 김영삼과 경쟁했지만 패배했다. 그는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국민은 그를 잊지 않았다. 그는 다시 돌아왔다. 1997년, IMF 위기 속에서 그는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그는 보수와의 연합을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룬 대통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