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는 권력의 중심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박근혜, 박근영, 박지만. 그들은 대통령의 자녀였고, 동시에 한 여인의 자식이었다. 육영수 여사는 아이들에게 청와대가 특별한 공간이 아니라,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의 장소임을 늘 강조했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종이 한 장도 개인 용도로 쓰면 안 된다”고 말했고, 그 말은 아이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박근혜는 장녀였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녀는 어머니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며 자랐다. 그녀는 청와대의 복도에서 뛰어다니기보다는, 책상 앞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는 아이였다. 육영수는 그런 그녀를 자주 안아주었고, “말은 적지만 마음이 깊은 아이”라고 했다.
박근영은 둘째였다. 언니와는 달리 활발하고 감정 표현이 분명한 아이였다. 그녀는 청와대의 정원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고, 경호원들과도 금세 친해졌다. 육영수는 박근영에게 “네 감정은 소중하지만, 그 감정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박근영은 그 말을 기억했고, 자라면서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갔다.
박지만은 막내였다. 아버지 박정희가 가장 늦게 얻은 아들이었기에, 가족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기계와 장난감을 좋아했고, 혼자서 무언가를 조립하는 데 몰두하곤 했다. 육영수는 그런 그를 보며 “이 아이는 손으로 세상을 이해하는구나”라고 말했다.
육영수는 자녀들에게 엄격하면서도 따뜻한 교육을 했다. 그녀는 자녀들이 권력의 자녀로서 특권을 누리기보다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살아가기를 바랐다. 청와대 안에서도 아이들은 일반 학교에 다녔고, 특별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육영수는 자녀들의 교복을 직접 챙겼고, 도시락 반찬까지 신경 썼다.
박근혜는 어머니의 그런 정성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녀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교사들에게는 성실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읽는 민원 편지를 옆에서 함께 읽기도 했고, 때로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억울할까?”라고 묻기도 했다. 육영수는 그런 질문에 “사람은 누구나 사연이 있어. 그 사연을 듣는 것이 정치야”라고 답했다.
박근영은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고, 육영수는 청와대에 피아노 교습을 요청했다. 박근영은 음악을 통해 감정을 표현했고, 어머니는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이 아이는 마음을 소리로 말하는구나”라고 했다.
박지만은 장난감 병정과 자동차를 좋아했다. 그는 종종 청와대 경호원들에게 “이 총은 어떻게 작동해요?”라고 묻기도 했고, 경호원들은 웃으며 설명해주었다. 육영수는 박지만에게 “힘은 지혜와 함께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위험해져”라고 말했다.
청와대의 아침은 조용했다. 박정희는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읽었고, 육영수는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챙겼다. 식탁에서는 정치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육영수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나라를 걱정하고, 우리는 서로를 걱정해야 해”라고 말했다.
박근혜는 아침마다 어머니가 읽는 신문을 옆에서 함께 보았다. 그녀는 기사 속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했고, 때로는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자주 나오지?”라고 묻기도 했다. 육영수는 “그 사람은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하지만 중요한 일도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해”라고 답했다.
박근영은 아침 식사 후 정원으로 나가 꽃을 살폈다. 그녀는 꽃의 이름을 외우는 것을 좋아했고, 육영수는 그런 그녀에게 “꽃도 사람처럼 이름이 있어. 이름을 불러줘야 꽃도 웃지”라고 말했다.
박지만은 식사 후 장난감을 챙겨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혼자서 무언가를 만드는 데 집중했고, 육영수는 그런 그를 보며 “이 아이는 세상을 자기 손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식이 열리던 날. 세 아이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머니의 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총성이 울렸고, 육영수는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근혜는 그 순간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그녀는 충격 속에서 침묵했고, 그 침묵은 이후 그녀의 삶을 지배했다.
박근영은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울부짖었고, “왜 엄마가 죽어야 해?”라고 외쳤다. 박정희는 그런 그녀를 안아주었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그는 그날 이후 말수가 줄었고, 청와대는 더욱 조용해졌다.
박지만은 너무 어려서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육영수의 빈자리는 가족 모두에게 깊은 상처였고,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았다.
육영수가 떠난 후, 박근혜는 22세의 나이에 청와대의 안주인이 되었다. 그녀는 외교 행사에 참석했고,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 그녀는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했지만, 그 자리는 너무 컸고, 너무 무거웠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역할을 수행했고, 그 침묵은 이후 그녀의 정치적 스타일로 이어졌다.
박근영은 예술을 통해 슬픔을 극복하려 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렸고, 음악을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사진 앞에서 자주 울었고, “엄마는 왜 나를 두고 갔을까?”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박지만은 군에 입대하며 어머니의 유산을 기억했다. 그는 강인한 군인이 되기를 바랐고, 어머니가 말했던 “힘은 지혜와 함께 써야 해”라는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는 군인의 길을 걸으며, 가족의 명예를 지키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