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

by 김작가a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김영삼의 상도동계 — 민주화의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정치의 중심에는 두 명의 거목이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 이들은 민주화의 동지이자 정치적 라이벌로, 각자의 철학과 방식으로 한국 정치의 방향을 이끌었다. 그리고 그들 곁에는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치적 가신 그룹들이 있었다. 이 두 계파는 단순한 인맥의 집합이 아니라, 정치적 노선과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세력으로 기능했다.

1.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기원

동교동계는 김대중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정국을 논의하던 시절부터 형성된 정치 그룹이다. 상도동계는 김영삼이 동작구 상도동 자택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던 공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들은 단순히 거주지의 이름을 따온 것이 아니라, 각자의 정치 철학과 리더십 스타일을 반영하는 상징적 명칭이었다.

김대중은 언론과 지식인, 재야 인사들과의 교류를 중시했고, 국제적 시각과 인권, 평화, 복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반면 김영삼은 조직력과 결단력을 바탕으로 당내 장악력을 키우며, 강력한 반독재 투쟁과 정치 개혁을 주도했다. 이 차이는 곧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소가 되었다.

2. 1970~80년대: 민주화 투쟁의 동지

1970년대는 박정희 유신체제의 억압 속에서 야당 정치인들이 고난을 겪던 시기였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맞붙었고, 이후 납치와 감금, 사형 선고까지 받으며 극심한 탄압을 겪었다. 김영삼 역시 1979년 신민당 총재로서 유신체제에 맞서다 국회의원직을 제명당했고, 이 사건은 부마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시기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민주화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협력했다. 김대중의 측근인 권노갑, 한화갑, 박지원 등은 재야와의 연대를 통해 민주화 운동을 확산시켰고, 김영삼의 측근인 김덕룡, 최형우, 김동영 등은 당내 조직을 통해 반독재 투쟁을 이어갔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두 계파는 잠시 침묵했지만,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을 계기로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두 계파의 갈등은 본격화되었다.

3. 1987년 대선: 양김의 분열과 민주화의 좌절

1987년은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해였다. 6월 항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국민은 민주주의의 문턱에 다가섰다.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고, 각각 평화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다.

이 분열은 결과적으로 노태우의 당선을 허용했고, 민주화 세력은 정권 교체에 실패했다.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서로를 비난했고, 국민은 ‘양김의 분열’에 실망했다. 이 사건은 두 계파의 정치적 대립을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1990년 3당 합당: 상도동계의 선택과 동교동계의 반발

1990년, 김영삼은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공화당과 3당 합당을 단행했다. 이는 보수 통합을 통한 집권 전략이었지만, 민주화 세력 내부에서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상도동계는 김영삼의 결단을 지지했고, 여권 내 개혁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반면 동교동계는 이를 ‘야합’으로 규정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을 재창당했고, 동교동계는 야권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했다. 이 시기부터 두 계파는 명확한 노선 차이를 보이며, 정치적 경쟁을 이어갔다.

5. 1992년과 1997년: 두 계파의 집권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은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상도동계는 집권 여당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고, 김영삼 정부의 개혁 정책을 주도했다.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지방자치제 실시 등은 상도동계의 정치적 유산으로 남았다.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동교동계는 집권 여당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았고, 햇볕정책, IT 산업 육성, IMF 극복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두 계파는 각각의 방식으로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다.

6. 집권 이후의 균열과 재편

김영삼 정부 말기, 상도동계 내부에서는 일부 이탈이 있었지만, 대체로 김영삼과의 정치적 결속은 유지되었다. 김동영, 최형우 등은 끝까지 김영삼을 지지했고, 상도동계는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반면 동교동계는 김대중 정부 말기부터 균열이 시작되었다. 대북송금 특검, 후단협 사태, 노무현 탄핵 등에서 동교동계 일부 인사들이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과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일부는 박근혜를 지지하거나,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2.

이러한 행보는 동교동계의 정치적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었고, 상도동계와의 비교에서 일관성 부족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7. 화해와 유산

2009년 김대중의 서거 직전, 김영삼은 병문안을 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이후 동교동계와 상도동계는 공동 상주를 맡고, 매년 22일 ‘통합과 화합’을 위한 모임을 이어갔다. 이들은 민주화의 동지로서, 정치적 경쟁을 넘어 역사적 유산을 공유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동교동계는 인권과 평화, 복지의 정치적 유산을 남겼고, 상도동계는 개혁과 원칙, 결단의 정치 문화를 남겼다. 두 계파는 한국 민주주의의 양축이었으며, 그들의 갈등과 협력은 한국 정치의 진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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