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정치적 통찰과 국제적 감각을 겸비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동교동계’라 불리는 정치적 측근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김대중의 정치적 철학을 공유하고, 그의 고난과 투쟁을 함께한 동지들이었다. 그러나 동교동계는 시간이 흐르며 민주화의 유산을 계승하기보다는, 계파 정치의 상징으로 변질되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이 글에서는 동교동계의 형성과정, 정치적 역할, 그리고 그들이 직면한 문제점들을 중심으로 그 명암을 조명하고자 한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이 서울 마포구 동교동 자택에서 정국을 논의하던 시절부터 형성된 정치 그룹이다. 이들은 단순한 인맥의 집합이 아니라, 김대중의 정치 철학과 민주화 운동의 실천적 동반자들이었다. 권노갑, 한화갑, 박지원 등은 김대중의 정치적 고난을 함께 겪으며, 재야와의 연대를 통해 민주화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동교동계는 1970~80년대 박정희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부정권에 맞서 싸우며, 야당 정치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았다. 김대중이 납치, 감금, 사형 선고 등 극심한 탄압을 받는 동안에도 이들은 그의 곁을 지켰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 도입이라는 성과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실패는 민주화 세력의 분열을 초래했고, 동교동계는 이후 야권의 중심 세력으로 남았지만, 정치적 전략과 조직 운영에서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동교동계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계파 정치’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는 점이다. 김대중이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동교동계는 집권 여당의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들은 당내에서 독자적인 세력화에 집중하며, 민주당의 개혁과 통합보다는 내부 권력 유지에 몰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한화갑, 권노갑 등은 당권 경쟁에서 조직력을 앞세워 세 대결을 벌였고, 이는 민주당 내의 개혁파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한다는 명분 아래, 당내 인사 배치와 공천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는 당의 민주적 운영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을 앞두고 동교동계의 해체를 지시하며, “동교동계라는 용어의 사용이나 그러한 이름의 모임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는 동교동계가 더 이상 정치적 유산이 아닌, 당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정치적 철학을 계승한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김심’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반복되었다. 김대중의 의중을 왜곡하거나, 그의 이름을 빌려 당내 권력 투쟁에 개입하는 사례가 발생하면서, 동교동계는 점차 국민적 신뢰를 잃게 되었다.
특히 2002년 대선 이후, 민주당 내에서 동교동계 인사들이 당권 경쟁에 나서며 ‘김심’을 앞세운 정치적 행보는 당내 개혁 세력과의 충돌을 야기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민주당 정치에 김 대통령을 이용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러한 행보는 동교동계가 김대중의 철학을 계승하기보다는, 그의 이름을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낳았고, 결국 김대중 대통령은 동교동계의 해체를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 구축의 물꼬를 터주려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동교동계는 또 다른 시험대에 올랐다. 노무현은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개혁 기조를 계승하겠다고 밝혔지만, 동교동계 일부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후단협(후보 단일화 협상 반대)’ 사태를 주도했다.
이들은 노무현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며, 민주당 내에서 그의 당선을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는 국민적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동교동계는 이 과정에서 ‘구시대 정치의 잔재’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민주당의 개혁 흐름에 역행하는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후단협 사태는 동교동계 내부의 분열을 가속화시켰고, 일부 인사들은 이후 열린우리당으로 이탈하거나, 다른 정치 세력과 연대하는 등 동교동계의 정치적 정체성은 점차 흐려지게 된다.
김대중 정부 말기, 대북송금 특검이 실시되면서 동교동계는 또 다른 정치적 위기를 맞이한다. 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법적·도덕적 논란을 불러왔고, 동교동계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국민적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박지원 등 핵심 인사들이 특검 대상이 되면서, 동교동계는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고, 이후 민주당 내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대북송금 특검은 동교동계가 김대중의 유산을 지키기보다는, 정치적 생존을 위한 방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화시켰다.
202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교동계는 더불어민주당 내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2024년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비서 출신 김한정 의원, ‘동교동계 막내’ 설훈 의원 등이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탈당하면서, 동교동계는 사실상 정치권에서 퇴장하게 된다.
이들은 당내 ‘하위 10%’ 평가를 받으며 경선에서 불이익을 받았고, 일부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하거나 새로운 정치 세력에 합류했다. 이는 동교동계가 더 이상 민주당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세대교체는 필연적이나, 그들의 공로가 인정받지 못한 점은 안타깝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지만, 동시에 “동교동계는 이제 흔적도 없어졌고, 민주당은 친명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는 현실적 인식도 존재한다.
동교동계는 분명히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대중의 정치적 철학을 실천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그들의 헌신은 역사적으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이 집권 이후 보여준 계파 정치, 당내 갈등, 정치적 생존을 위한 행보는 민주주의의 발전보다는 정당 정치의 후퇴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