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부는 천을 꿰매는 사람이었다. 그는 포목장사로 평생을 살았고, 해방 이후 부산 국제시장에서 포목점을 열었다. 그의 천은 단순한 직물이 아니었다. 일제에 빼앗긴 권리, 해방의 혼란, 전쟁의 상처—그 모든 것을 그는 천에 수놓았다. 그는 칠성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보호비를 요구하는 조직폭력배 앞에서 그는 천을 꺼내 들었다. “나는 내 천으로 지킨다. 주먹으로는 못 꿰맨다.” 그 말은 시장 상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천은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조부는 말없이 꿰맸다. 그는 싸우지 않았다. 대신 침묵 속에서 천을 꿰매며, 기억을 이어갔다.
내 아버지 준호는 조부의 천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4월 18일 밤, 중앙대학교 근처 해장국집에서 그는 동지들과 모였다. 그들은 천 조각을 꺼내 꿰맸다. 쓰러진 학생, 침묵한 노동자, 외면당한 노인의 이름이 수놓아졌다. “내일, 우리는 꿰매러 간다. 찢긴 권리를, 짓밟힌 자유를.” 그들은 자갈 대신 천을 들었다. 그것은 무기가 아닌 기억의 깃발이었다.
4월 19일, 새벽. 준호는 ‘찢긴 권리의 깃발’을 품에 안고 경무대로 향했다. 학생들과 함께 행진하며, 그는 외쳤다. “민주주의를 꿰매자! 자유를 꿰매자!” 천은 바람에 펄럭였고, 경찰은 당황했다. 곤봉이 휘둘러졌고, 학생들이 쓰러졌다. 준호는 그들을 꿰맸다. 천으로, 말로, 손으로.
경무대 앞, 총성이 울렸다. 그의 곁에 있던 민철이 쓰러졌다. “준호… 꿰매줘…” 그 말은 피보다 깊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준호는 민철을 업고 세브란스 병원까지 달렸다. 그곳에서 그는 민철의 이름을 천에 꿰맸다. “살아있든, 죽었든, 너는 꿰매진다. 너는 잊히지 않는다.”
혁명은 끝났지만, 국가의 보복은 시작되었다. 준호는 군사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고문실로 끌려갔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꿰맸다. 민철의 이름, 조부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꿰맨 문장들.
그의 정신은 찢어졌고, 꿰맴은 고통이 되었다. 그는 강제징집되어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였다. 그는 민철과 대화했고, 조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의사들은 ‘편집형 정신증’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꿰맴을 멈추지 않았다. 군복 안쪽에 몰래 천 조각을 숨기고, 밤마다 이름을 수놓았다. 쓰러진 동료, 자살한 병사, 잊힌 가족. 그는 침묵 속에서 꿰맸다.
제대 후, 준호는 조부에게 돌아왔다. 조부는 그에게 상자를 건넸다. 그 안에는 법원, 시청, 국군병원, 전파연구원 부지에 대한 소유권 증서가 있었다. “이건 내 천이고, 너의 싸움이다.”
조부는 평생을 침묵으로 꿰맸다. 그는 국가에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었고, 사용료를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싸우지 않았다. 나는 꿰맸다.”
그러나 준호는 달랐다. 그는 말했다. “그 침묵이 우리를 병들게 했어요. 우리는 꿰매야 해요. 말로, 기록으로, 법으로.”
해장국집의 밤, 두 사람은 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조부는 천을 접었고, 준호는 펼쳤다. “그건 꿰맴이 아니라 싸움이다.” “아니요. 그건 꿰맴의 확장입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말없이 천을 꿰맸다. 조부는 침묵으로, 준호는 문장으로. 그리고 그 천은 꿰맴의 유산이 되었다.
나는 준호의 자식이다. 어릴 적, 그는 나에게 천을 꿰매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늘 멀리 있었다. 밤마다 그는 민철과 대화했고, 조부와 싸웠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열두 살이 되던 해, 나도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현실이 뒤틀리고, 기억이 흐려졌다.
의사는 말했다. “아버지의 정신증이 유전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 동생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 우리는 함께 천을 꿰맸다. 그것은 치료가 아니라 기억의 정리였다. 아버지는 말했다. “너희는 꿰맴의 혈통이다. 고통은 유전되지만, 꿰맴도 유전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아버지는 휠체어를 타고 법정에 들어섰다. 나는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천을 펼쳤다. 그 위에는 고문으로 죽은 동지들의 이름, 정신병원에 갇힌 사람들의 이름, 그리고 나와 동생의 이름이 꿰매져 있었다.
“이 천은 증거입니다. 국가가 찢은 권리, 고문으로 꿰맨 상처, 그리고 유전된 고통.” 판사는 침묵했고, 시민들은 울었다. 국가는 마침내 사용료를 반환해야 했지만, 하지 않았다. 일부 판결은 “시효취득이 국가에 있다”는 요설을 내세웠고, 원인무효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점유를 정당화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꿰맴학교를 세웠고, 나는 소송을 이어갔다. 그 땅은 꿰맴의 학교가 되어야 한다. 고문받은 자, 잊힌 자, 침묵한 자를 위한 공간.
친일파의 재산을 추적하고 환수하는 일 역시 꿰맴의 연장선이다. 그들의 재산은 민족의 고통 위에 세워진 구조적 침묵의 상징이다. 우리는 그 침묵을 꿰매야 한다. 기억을 복원하고,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아버지는 늙었다. 그는 다시 해장국집에 앉았다. 그곳은 이제 꿰맴학교의 식당이었다. 그는 천을 꺼냈다. 그 위에는 조부의 이름, 민철의 이름, 고문 피해자들의 이름, 그리고 나와 동생의 이름이 꿰매져 있었다.
“나는 싸우지 않았다. 나는 꿰맸다. 이 천은 나의 고통이며, 너희의 문장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한 줄을 꿰맸다. “고통은 찢긴 기억이고, 꿰맴은 그 기억을 잇는 실이다. 유전된 고통은 꿰맴으로 치유된다. 침묵한 국가도 꿰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