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한 땅, 꿰매는 사람들
조부 김태수는 포목장사였다. 해방 이후 부산 국제시장에 포목점을 열었고, 천을 꿰매며 살아왔다. 그의 천은 단순한 직물이 아니었다. 일제에 빼앗긴 권리, 해방의 혼란, 전쟁의 상처—그 모든 것을 그는 천에 수놓았다.
1978년, 김재규가 3군단장에서 중앙정보부장으로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조부는 부산 법원 및 시청 인근 부지를 국가에 기부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었다. 김재규의 승진을 돕기 위한 정치적 배려였고, 조부는 그 대가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침묵으로 꿰맸다. “이 땅은 국가의 기억이 되어야 한다.” 그는 그렇게 말했고, 국가는 그렇게 잊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조부의 세계는 무너졌다. 전두환이 등장했고, 숙청이 시작되었다. 조부의 고모부 이정우는 육사 출신 대령이었다. 그는 군 내부에서 김재규와 가까운 인물로 분류되었고, 1980년 봄, 아무런 설명 없이 강제 예편당했다. 그의 이름은 군 기록에서 사라졌고, 가족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조부는 말이 없었다. 그는 천을 꺼내 들었다. 그 위에 정우의 이름을 꿰맸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잘못한 게 없다. 국가가 찢은 거다. 나는 꿰맬 뿐이다.” 정우는 그날 이후 군복을 입지 않았다. 그는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기술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에게 바느질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친 첫 수업의 제목은 ‘찢긴 천을 꿰매는 법’이었다.
아버지 준호는 조부의 천을 품고 서울로 올라왔다. 1960년 4월 18일 밤, 중앙대학교 근처 해장국집에서 그는 동지들과 모였다. 그들은 천 조각을 꺼내 꿰맸다. 쓰러진 학생, 침묵한 노동자, 외면당한 노인의 이름이 수놓아졌다. “내일, 우리는 꿰매러 간다. 찢긴 권리를, 짓밟힌 자유를.” 4월 19일, 새벽. 준호는 ‘찢긴 권리의 깃발’을 품에 안고 경무대로 향했다. 학생들과 함께 행진하며, 그는 외쳤다. “민주주의를 꿰매자! 자유를 꿰매자!” 천은 바람에 펄럭였고, 경찰은 당황했다. 곤봉이 휘둘러졌고, 학생들이 쓰러졌다. 준호는 그들을 꿰맸다. 천으로, 말로, 손으로. 경무대 앞, 총성이 울렸다. 그의 곁에 있던 민철이 쓰러졌다. “준호… 꿰매줘…” 그 말은 피보다 깊게 그의 가슴을 찔렀다. 준호는 민철을 업고 세브란스 병원까지 달렸다. 그곳에서 그는 민철의 이름을 천에 꿰맸다. “살아있든, 죽었든, 너는 꿰매진다. 너는 잊히지 않는다.”
혁명은 끝났지만, 국가의 보복은 시작되었다. 준호는 군사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고문실로 끌려갔다.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으로 꿰맸다. 민철의 이름, 조부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꿰맨 문장들. 그의 정신은 찢어졌고, 꿰맴은 고통이 되었다. 그는 강제징집되어 최전방 부대에 배치되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현실과 환상이 뒤섞였다. 그는 민철과 대화했고, 조부의 목소리를 들었다. 의사들은 ‘편집형 정신증’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꿰맴을 멈추지 않았다. 군복 안쪽에 몰래 천 조각을 숨기고, 밤마다 이름을 수놓았다. 쓰러진 동료, 자살한 병사, 잊힌 가족. 그는 침묵 속에서 꿰맸다.
나는 준호의 아들이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면접은 무난했고, 체력검정도 통과했다. 그러나 최종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담당 장교는 말했다. “가족 이력상, 보안상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꿰맨 것도 아니고, 총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조부의 기부와 고모부의 예편을 이유로 나를 배제했다. 나는 그날 밤, 천을 꺼냈다. 고모부의 이름, 조부의 이름, 내 이름을 꿰맸다. 그리고 그 옆에 이렇게 수놓았다. “나는 꿰맴의 후손이다. 나는 총을 들지 못했지만, 실을 잡는다.”
조부가 국가에 기부한 부산 법원 및 시청 부지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 방치되었다. 김재규의 승진은 이루어졌고, 조부는 그 대가로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 그는 문서 한 장 없이 땅을 넘겼고, 국가는 그 침묵을 점유로 간주했다. 1983년, 아버지 준호는 사용료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법정에서 말했다. “이 땅은 기부가 아니라 꿰맴입니다. 국가가 찢은 기억을, 우리는 꿰매러 왔습니다.” 국가는 응답하지 않았다. 판사는 말했다. “시효취득이 국가에 있다.” 준호는 천을 꺼냈다. 그 위에는 ‘무상점유, 무상침묵, 무상폭력’이라는 문장이 꿰매져 있었다. 그는 외쳤다. “침묵은 점유가 아닙니다. 꿰맴은 증언입니다.” (소송은 현재까지 계속된다)
우리는 꿰맴학교를 세웠다. 고문 피해자, 강제 예편자, 정신병원에 갇힌 이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천을 꿰맸고, 기록을 남겼다. 꿰맴은 단지 바느질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복원, 정의의 실천, 그리고 유산의 계승이었다. 첫 수업의 제목은 ‘침묵을 꿰매는 법’이었다. 나는 교단에 섰고,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말했다. “말하지 못한 자들의 이름을 꿰매세요. 그들이 침묵했기에, 우리는 꿰맵니다.” 한 학생이 천에 ‘김영수’라는 이름을 꿰맸다. 그는 말했다. “우리 아버지예요. 1980년, 남영동에서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 이름은 이제 기억입니다. 꿰맴은 증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