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봄, 청와대의 집무실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박정희는 창밖을 바라보며 일본 특사단의 도착을 기다렸다. 한일협정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적 굴욕과 정치적 거래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대한민국은 일본으로부터 6억 달러의 청구권 자금을 받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중 6600만 달러는 비공식 경로로 흘러들어왔다. 이 돈은 국가 재건을 위한 자금이 아니었다. 그것은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곧 권력의 연료였다.
김종필은 그 자금을 민주공화당의 선거자금으로 분배했다. 1967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일본 기업들과의 독점권 거래를 통해 자금을 확보했다. 정부방출미 수출, 철강 계약, 통신장비 도입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본 자본은 한국의 권력 중심으로 흘러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천만 원의 자금이 기업들로부터 흘러나와, 정권의 금고를 채웠다.
중앙정보부는 증권시장을 조작해 20억 환의 자금을 조달했다. 윤응상과 결탁한 김종필은 주가를 폭등시키고, 그 차익을 정치자금으로 전환했다.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갔지만, 정권은 그 돈으로 야당을 교란하고 언론을 통제했다. 증권파동은 단순한 금융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자금 조달 방식이었고, 검찰은 이를 수사하지 않았다. 아니, 수사할 수 없었다.
성동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 건설 현장. 중앙정보부는 외화 획득을 명분으로 5억 원 이상의 정부 자금을 빼돌렸다. 일본제 장비와 자재는 무관세로 들여오고, 수천 명의 인력이 무상 동원되었다. 그 이익은 정권의 비밀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워커힐은 단순한 호텔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금고였고, 검찰은 그 금고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이후락은 스위스 유니언뱅크에 비밀 계좌를 개설했다. 걸프사로부터 받은 20만 달러는 박정희의 방미 경비 명목이었지만, 실상은 비자금이었다. 김형욱은 훗날 "그 돈은 야당 지도자 매수와 언론 장악에 쓰였다"고 증언했다. 스위스의 금고는 대한민국 권력의 그림자였고, 검찰은 그 그림자를 쫓지 않았다. 아니, 쫓을 수 없었다.
1971년 대선. 국가예산의 7분의 1, 약 60조 원에 달하는 자금이 선거에 투입되었다. 박정희는 이 자금으로 전국을 장악하고, 야당 후보를 고립시켰다. 선거는 승리로 끝났지만, 그 대가는 민주주의의 붕괴였다. 검찰은 선거 자금의 흐름을 추적하지 않았다. 아니, 추적하지 못했다. 그것은 권력의 명령이었다.
망명한 김형욱은 미국에서 박정희의 비자금 실체를 폭로했다. 그는 "박정희는 청와대 집무실 책상 뒤 캐비닛에 스위스에서 인출한 돈을 보관했다"고 증언했다. 그 돈은 정권 유지뿐 아니라, 개인적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검찰은 그 증언을 외면했다. 아니,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1972년, 유신헌법 선포. 박정희는 비자금을 기반으로 국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장악했다. 정치자금은 군부와 정보기관을 강화하는 데 쓰였다. 국민은 침묵했고, 권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검찰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했고, 반대세력을 기소했다. 그것은 법의 이름을 빌린 정치였다.
1979년, 궁정동.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고 박정희는 쓰러졌다. 그의 죽음 이후, 스위스 계좌의 행방은 묘연해졌다. 박근혜가 계좌를 인수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검찰은 그 계좌를 추적하지 않았다. 아니, 추적하지 못했다. 그것은 권력의 유산이었다.
박정희가 주무른 정치자금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다. 그것은 권력의 구조를 바꾼 도구였다. 그 자금은 검찰을 강화하고, 사법권을 정치화하며, 대한민국을 "검찰공화국"으로 이끄는 씨앗이 되었다. 검찰은 그 씨앗을 키웠고, 권력은 그 열매를 따먹었다.
이제 우리는 그 씨앗이 어떻게 자라났는지를 목격하고 있다. 검찰은 정의의 수호자라는 명분 아래, 권력의 칼날로 기능했다. 수사권과 기소권의 독점은 검찰을 견제 불가능한 존재로 만들었고, 정치적 사건 개입은 그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검찰공화국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대한민국 권력의 실체이며, 민주주의의 시험대다.
다음 회차에서는 전두환 정권 시기의 검찰 권력과 5공화국의 구조를 중심으로, 검찰공화국의 확장 과정을 추적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