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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Dec 11. 2021

내가 빌리 엘리어트였을 때

내 최고의 무대


지금까지 무대를 모두 기억한다. 어떤 춤을 추었는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 무대에 오르기 전 음악 전주 소리에 심장이 얼마나 크게 울렸는지. 제대로 춤추지 못하고 내려와 분한 마음에 몰래 눈물을 훔쳤던 무대도, 많은 생각과 고민 끝에 답을 찾을 수 있었던 짜릿한 무대도 모두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중에 어제 일처럼 생생한 무대가 있다. 11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선명하게 그려지는 무대. 12살 임선우의 일기장을 열어보았다. 2010년 10월 30일 토요일, 제목은 ‘내 최고의 공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하이라이트 ‘Electricity’. 춤을 출 때 어떤 느낌이 드냐는 질문에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하지 못해 결국 춤으로 표현하는 빌리의 독무다. 발레와 현대무용, 아크로바틱이 어우러진 춤을 5분 동안 쉬지 않고 추며 노래까지 부르는, 빌리의 감정선이 최고조에 이르는 부분이다. 사건은 ‘Electricity’의 아크로바틱을 할 때 일어났다.


난 5명의 빌리 중 제일 힘이 약했다. 그래서일까 발레, 연기, 노래, 탭댄스, 아크로바틱 등 많은 것을 연습해야 했던 빌리스쿨에서 아크로바틱을 가장 어려워했다. 자신 있게 몸을 던져야 하는데 겁을 먹었다. 결국 다른 4명의 빌리들이 화려한 재주넘기를 할 때 난 간단한 동작으로 넘어가곤 했다. 장시간 큰 공연의 호흡을 이끌어가야 하는 빌리가 재주넘기 하나 못한다고 공연에 지장을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 당시의 난, 다른 빌리들은 다 해내는 동작을 혼자서만 하지 못한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몇 번의 공연을 마치고 어느 정도 무대에 적응을 하자 욕심이 생겼다. 아크로바틱을 꼭 성공하고 싶었다. 공연 기간에도 열심히 연습했다.     


‘발을 사선 뒤쪽으로 강하게 밀어낸다. 손이 바닥에 닿는 순간 배를 당겨주며 튕겨낸다.’     


수도 없이 반복한 연습 끝에 동작을 만들어냈다. 다가오는 다음 공연에 시도해 보기로 했다. 공연 당일 안무가님과 무대 리허설을 할 때도 가뿐하게 성공했다. “할 수 있어! 자신감을 가져!”라며 등을 토닥여주시던 안무가님의 응원에 힘이 났다. ‘반드시 해낼 거야!’ 스스로 주문을 외웠다.


공연이 진행되고, ‘Electricity’를 시작했다. 두 번의 재주넘기 중 첫 번째는 무난하게 넘어갔다. 관객석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해냈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이 되었다. 두 번째는 연결 동작이었다. 도움닫기를 하기 전, 갑자기 겁이 났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라 모르겠다.     


‘쿵!’     


머리로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무슨 상황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머리가 굉장히 아팠고, 난 쓰러져 있었다. 음악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고개를 들자 아빠 역할의 배우님이 크게 당황하여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솔로를 마치고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감독님, 배우님, 선생님 모두가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부딪힌 부분이 얼얼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아직 공연이 남아있었다. 끝까지 마무리하고 싶었다. 어린 나이에 어떤 힘이 그 순간을 견디게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참아가며 마지막 장면까지 춤을 추었다.


막이 내려갔다. 모두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미안하다.” 안무가님이 눈물을 보이셨다. 내가 겁을 먹고 실수한 건데 왜 안무가님이 미안하다고 하시지 의아해했지만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그때 안무가님의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바로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다. 결과를 기다리는데 배우들의 몸 관리를 해주시던 피지오 선생님이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이번 공연은 250회 공연 중 최고의 공연일 거야. 고작 열 살짜리가 머리를 다쳐도 끝까지 공연을 마무리 한건 대단한 거야. 쓰러진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나 춤을 이어나가는 모습에 관객들은 빌리가 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열정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걸.”


결국 재주넘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값진 것을 얻었다. 온몸으로 춤추던 빌리처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단단한 힘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고 해야 할까. 여전히 안무가님의 눈물과 피지오 선생님의 말은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춤 인생에서 흔들리지 않게 붙잡아주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지난해, 다리를 다쳤다. 이후로 세상이 너무 어둡게 보였다. 울컥, 마음이 답답하고 깜깜한 밤이면 그날의 무대를 생각한다. 12살의 빌리도 부상을 당하고도 무대를 책임지고 끝까지 춤을 췄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의 무대는 아직 막이 내려가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다시 일어날 거니까, 훌훌 털고 일어나 마지막 커튼콜까지 춤을 추겠다. 그날의 무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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