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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헤르만 헤세 May 06. 2024

다시 밤이 찾아온다 해도 두려워 말기를



긴 글이 될 것 같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새하얀 거리를 사박사박 걸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파릇파릇한 잎이 활짝 핀 나무가 손을 흔들며 반긴다.


5월에 있을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리허설이 한창인 발레단. 정신없이 춤추다 보면 7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작품 내 전투씬에서 격한 칼싸움을 하는데, 칼이 생각보다 무겁다. 덕분에 오른쪽 전완근이 뭉치고 뻐근하다. 물론 전완근뿐만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몸 곳곳에서 근육통이 인사를 한다.


아파도 즐겁다. 행복하다.


어김없이 콕콕 쑤시는 몸을 일으켜 발레단에 갈 준비를 할 때도. 클라스 준비를 위해 땀을 낼 때도. 바를 잡고 팔과 다리를 쭉 늘릴 때도. 피아니스트 선생님 연주에 맞춰 칼을 휘두를 때도.


그냥 너무 행복하다.


리허설이 끝나면 마무리 스트레칭을 한 뒤, 얼음이 가득 담긴 통에 두 정강이를 푹 담근다. (아이싱. 부상 이후로 연습이 끝나면 반드시 하는 루틴이다.)


마음속으로 내게 말한다.


오늘도 잘 버텨줘서 고맙다고.


*


지난 2월 16일~18일. 복귀 무대로 <코리아 이모션 / 정> 공연을 마쳤다.


바로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싶었지만, 3월 내내 <백조의 호수> 투어가 주말마다 있어 쉽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픽 쓰러지기도 했고, 타이즈를 입고 클래식 발레를 추는 건 오랜만이라 신경 쓸 부분이 너무 많았다. 오로지 내 몸에 집중을 해야만 했다.


용인, 김천, 진주, 고양, 강동. 총 5주간의 백조 투어. 많은 회전과 점프를 해야 하는 역할을 맡았기에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고맙게도 내 정강이는 괜찮았고, 모든 공연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조금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일까. 5월인 지금이 되어서야 글을 써본다.


먼저 일기장을 쭉 읽었다. 2020년 5월 26일, 정강이 골절. 수술. 재활. 복귀. 두 번째 휴직.


기다림. 기다림. 또 기다림.


3년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오늘은 무얼 했는지, 정강이는 어떤지, 내 심정과 상황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일기장은 무려 3권이 훌쩍 넘어갔다. 읽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중간중간에 보기 흉한 글씨체가 보였다. 일기마저도 쓰기 싫었던 날. 한 줄 찍, 대충 휘갈겼던 날. 글씨체도 마음 따라가는 건지.


노트에 꾹꾹 눌러 담은 긴 이야기를 천천히 읽고 있자니 복잡 미묘했다. 분명 내가 겪은 일이고 쓴 글이었지만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 괴로운 기억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피식 헛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그래도 잘 해온 것 같다.


잘 버텨낸 것 같다.


일기장을 덮고선 조심스럽게 노트북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뭐부터 써야 하지.


마음 편히 가볍게 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일까.


이 글에 모든 걸 담을 순 없겠지만, 차분히 한 문장씩 채워봐야겠다.


*


“발레 생각 아예 안 하고 일반인처럼 살아보려고요. 다 나을 때까지.”


“네. 그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네요.”


22년 9월. 두 번째 휴직서를 내기 전 진단서를 끊기 위해 병원에 방문했을 때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

이 가있는 정강이 엑스레이 사진을 애써 외면하면서, 밝게.


돌이켜보면 골절상을 당하고 다리를 온전히 쉬게 해 준 적이 없었다. 빨리 복귀하겠다는 일념하에 매일 재활 운동을 했고, 뼈가 완벽히 붙지 않았음에도 슈즈를 신고 점프를 뛰었으니.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해보기로 했다. 발레 슈즈와 연습복을 옷장 속으로 깨끗하게 정리해 집어넣었다. 다 나을 때까지 절대 꺼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속상했지만, 적당히 괜찮았다.


그때의 나는 거의 반쯤 포기 상태였고, 진지하게 그만둘까라는 고민을 하루에 수십 번씩 하던 시기였으니까.


그 시기 즈음, 고수리 작가님의 <마음 쓰는 밤>을 읽었고, ‘10년 뒤 나’에게 편지를 썼다.


부정적인 생각만 할바에는 차라리 아예 잊어버리는 게 나았다. 일기장에 테이프로 꽁꽁 붙여 놓은 편지처럼, 다 잊어버리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진 모르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두 번째 휴직서를 내고서 제일 먼저 한 것은 동네 스포츠센터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수영을 배워보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해보고 싶었는데 발레 하느라 꿈도 못 꿨던 수영을 해보기로 했다. ‘이때 아니면 또 언제 해보겠어’하면서 무작정 센터를 찾았던 것 같다. 물에서 하는 운동이기에 정강이에 전혀 무리가 안 간다는 점도 딱 맞아떨어졌다. 오전마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 거리의 스포츠센터로 향했다.


1번 레일, 초보반. ‘음, 파’부터 시작해서 킥보드를 붙잡고 파닥파닥. 한창 날이 추워질 때라 초반에는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열심히 발장구를 치다 보면 금방 더워졌다. 물도 엄청 먹고, 귀에 물이 차고. 그래도 모범생(?)이라 하루도 안 빼고 수업을 듣다 보니 2주 정도 지났을까, 자유형을 홀로 성공하며 약 한 달 쯤에는 배영까지 마스터했다.


물 위에 누워 하얀 천장을 보며 둥둥 떠있다 보면 기분이 묘하게 포근했다. 내 인생에 수영은 없을 줄 알았는데.


‘여름에 바다 가면 재미있게 놀겠네.’


이런 생각을 하며 홀로 큭큭거렸다. 접영까지 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그건 실패했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또 배워봐야지.


그해 겨울에는 운전학원을 다녔다.


크고 작은 이슈가 있었지만 면허를 땄고, 주말마다 아버지 차를 빌려 드라이브를 했다. 뒤에 ‘초보운전’ 딱지를 크게 붙여놓고. 잔뜩 긴장한 나머지 운전대를 잡은 손에 땀이 자꾸만 찼던 처음이지만 지금은 그래도 여유가 조금 생겼다. 하하.


웹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한창 즐겨 보던 웹툰이 웹소설 원작이라는 걸 알게 되고 원작 소설도 읽어보았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여러 유명 작품들을 하나씩 읽다 보니 나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세종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웹소설 강의를 들었던 기억을 되새기며 그럴싸한 제목도 정하고 캐릭터 설정에 플롯까지. 나름 공부도 하고 하루에 5000자씩 꼬박꼬박 채워봤다.


쓰는 내내 즐거웠다. 밤을 새워 쓸 정도로. 그렇게 10화 정도 분량을 채우고 호기롭게 문피아 일반연재에 업로드. 기대도 안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아쉬움을 삼키고 두 작품 정도 더 써보았지만 역시나. 어찌나 실망했던지 그날 일기장에 궁시렁댔는데 이제와 돌아보면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았는지, 웃음 밖에 안 나온다.


내 이름으로 된 웹소설 하나 완결해 보는 것. 사실 아직 현재진행형인 꿈이다. 발레단을 다니는 요즘도 새로운 소재를 구상하고 머릿속으로 스토리를 짜본다. 훗날 은퇴를 하면 웹소설 작가에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란 생각도 든다.


수영. 운전. 웹소설.


보고 싶은 영화도 빠짐없이 보러 다니고, 먹고 싶은 것도 원 없이 먹었다. 밥맛만 좋게 운동해서 그런지 금세 몸무게도 불어났다. 당장 무대에 설 것도 아니기에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발레를 완전히 잊고 지내려 노력한 것이 헛수고는 아니었다. 그동안 못 해본 일들을 경험하면서 재미를 붙였는지 온종일 우울했던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날도 조금은 줄어들었다.


3개월이 지났다.


22년 12월. 진료날.


진료날만 되면 무슨 거창한 시험을 치르는 것 같았다.


엑스레이를 찍고 교수님 방 앞에서 결과를 기다릴 때면 기분 나쁘게 가슴이 콕콕 쑤셨다. 그래도 조금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내심 기대를 하며 교수님을 뵈었다.


지겹도록 봐온 엑스레이 사진.


여전히 금이 가있는 정강이.


“별 차이는 없네요.”


“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전에 썼던 주사, 다시 써볼까요?”


노인 분들 골다공증 치료에 좋다는 호르몬 주사. 매일 밤 자기 전 정해진 시간, 스스로 배에 찔러 넣는 주사다. 첫 복귀를 하기 전에도 사용했었다.


‘아, 싫은데.’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한 달 내내,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12시에 맞춰 놓은 알람이 삐리리 울리면 배 옆쪽에 푹 찔러 넣는 주사. 바늘 사이로 흘러나오는 약 냄새가 너무 역했고 맞고 나면 속이 울렁거렸다. 호르몬 주사라 그런지 피부 트러블이 심하게 올라오기도 했고.


그렇게 맞기 싫었던 주사를 또 써야 한다니.


“두 달치 드릴게요.”


그것도 1개월 더.


그렇게 나는 다시 신데렐라가 되었다. 주사 때문일까. 별다른 변화가 없던 정강이 뼈 때문일까. 짜증이 늘었다. 불면증이 심해졌다. 활동을 하는 낮에는 그래도 참을만했다. 문제는 밤이었다. 잠이 통 오질 않으니 머릿속에는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푹 쉬면서 3개월이나 기다렸는데 좋아지지 않았다. 불유합이면 어쩌지? 교수님 말대로 정강이 골절 불유합으로 운동을 그만둔 스포츠 선수들이 많이 있다던데 그게 나 아닌가? 다음 진료 때도 똑같으면 어쩌지? 지금이라도 빨리 결정을 내리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그냥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해야 되나. 진짜 다 접고 웹소설 전업으로 도전해 봐?


‘아, 그래도 춤추고 싶은데.’


그래서 너무 괴로웠다. 뒤척이며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봐도 결론은 똑같았으니까. 차라리 ‘내가 발레를 극도로 싫어하게 되면 좋겠다’란 생각까지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해가 중천에 있어야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사이클은 엉망이 되었고 수영 수업도 자꾸만 빼먹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브런치를 열고 글을 하나 썼다. ‘저는 잘하고 있을까요’라는 제목을 붙였다. 진짜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몰라서 붙인 제목이었다.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전부 소중한 댓글이었다.


충분히 쉬고 와도 괜찮다고, 분명 다시 웃을 수 있는 때가 찾아올 거라고. 꼭 무대에 서서 춤을 추지 않더라도, 그냥 임선우라는 사람을 응원한다고. 말 꺼내기 쉽지 않을 아픈 당신의 경험까지 이야기하며 내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시는데. 사실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훌쩍였다. 어두컴컴한 방, 밝게 빛나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면서.


내가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응원해 주시는 걸까.


댓글을 모두 읽고 난 후, 그날 일기는 한 장을 꼬박 넘겼다.


한 분, 한 분 답글 해드리진 못했지만. 이 글을 빌어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드리고 싶다. 위태위태하던 시기에 날 붙잡아준 원동력이 되어줬던 따뜻한 위로. 가끔씩 힘이 들거나 지칠 때면 브런치에 들어와 한번 더 찾아 읽는다.


수영을 가고. 웹소설을 끄적이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사를 맞고.


23년 2월에는 세종사이버대학을 조기졸업했다. 학부 수석으로 단상에 나가 상도 받았다. 많은 축하를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문예창작 공부가 브런치로 이어졌고, 이렇게 기분 좋게 마무리되어 기뻤다.


23년 3월. 다시 병원을 향했다.


3개월 전 결과가 너무 안 좋았기에 마음을 비웠다. ‘뭐, 이번에도 똑같겠지.’라고 기대를 완전히 버렸던 것 같다.


“좀 좋아졌네요?”


사실이었다.


주사 덕분인지, 그냥 나을 시기가 되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전에 찍은 엑스레이 사진과 비교했을 때 미세하게나마 뼈가 채워진 것이 보였다.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얼마 만에 지은 웃음인지.


다행이었다. 불유합은 아니라서.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물론 발레는 시기상조였다. 완벽하게 뼈가 붙기 전까진 절대 춤을 추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봄이 물들어갔다. 벚꽃이 예쁘게 폈다. 꽃내음으로 가득한 석촌 호수 길을 걸으면서 나도 저 벚꽃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싱그럽게 피어나 세상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낸 벚꽃을 닮고 싶었다.


여름이 찾아왔다. 해를 거듭할수록 뜨거워지는 날씨에 혀를 내둘렀다.


가끔씩 야구장에 가서 경기도 관람했다. 유니폼을 챙겨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응원가를 목청 터져라 불렀다. 좋아하는 팀이 그해 가을야구를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가 보러 갔을 때는 이겨서 행복했다.


지인에게 안무 부탁을 받은 것도 그때쯤이었다.


휴직 기간 동안 총 3번의 안무 기회가 있었다. 그중 두 번은 독무였고, 한 번은 듀엣이었다. 전달받은 음악에 맞춰 지인이 원하는 분위기를 해석하며 동작을 꾸려나갔다. 춤추는 것에 온종일 목말라있을 때라, 정말 신나게 안무를 했던 것 같다. 안무를 하는 내내 내가 직접 춤추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애를 먹었지만.


지인들은 내 안무를 만족해하셨고, 무대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다고 했다. 초보 안무가로서 굉장한 뿌듯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또 3개월이 지났다. 23년 6월. 진료날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다리는 더 좋아졌다.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정답이었다.


9월, 12월, 3월, 6월. 3개월 단위로 찍은 사진들을 꼼꼼하게 비교해 보니 확연하게 차이가 보였다.


“조금씩 해보셔도 괜찮을 것 같네요.”


간단한 바 정도는 해도 된다는 교수님 말씀. 그토록 듣고 싶었던 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침착했다.


이미 휴직도 연장했고, 급하게 시작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준비가 덜 된 채로 복귀를 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확실하게 완치 판정을 받기 전까진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6개월 뒤에 봅시다.”


다음 진료는 12월. 12월은 내 생일이 있는 달.


‘생일 선물로 깔끔하게 붙은 정강이 뼈 사진이나 받으면 좋겠네.’


속으로 중얼거리며 병원에서 나왔다.


거의 1년 가까이 발레와 벽을 쌓고 지내온 몸. 이곳저곳에 통통하게 붙은 살부터 빼야 했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쉴 때 먹고 싶은 대로 다 먹다가 끊으려니까 힘들더라.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식단 조절을 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시 춤을 출수도 있으니까. 배고픈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래간만에 운동 센터를 갔다. 러닝 머신 위에서 천천히 걷는 것부터 간단하게 스트레칭까지 해주었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2, 3주 정도 고생했나. 적정 몸무게를 되찾았다.


아무도 없는 연습실을 찾았다. 타이즈를 입고 슈즈를 신었다. 역시 어색했다.


두 손으로 바를 잡고, 느릿느릿한 음악에 맞춰 플리에부터 시작했다.


‘괜찮은데?’


무릎만 굽혀도 뻐근해서 이를 악물어야 할 정도였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강이 상태가 괜찮다 보니 자꾸만 다양한 동작을 하고 싶은 욕심이 솟구쳤다. 그럴 때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절대 조급해지지 마. 무리하지 마. 하나씩 하나씩 하는 거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2일 정도 바를 하며 몸을 풀면 하루는 건너뛰고, (그 대신 운동은 하고.) 주말에는 반드시 쉬었다. 매일매일 하고 싶었지만 나름대로의 페이스 조절이었다. 띄엄띄엄 발레를 해서 그런가, 슈즈를 챙겨 연습실로 향할 때면 꼭 첫 데이트를 나가는 것 마냥 가슴이 울렁거렸다.


발레를 처음 시작했던 6살로 돌아간 것 같았다.


월, 수, 금. 문화 센터에서 1시간씩 수업을 들었던 그 시절로. 작은 가방에 연습복과 슈즈를 챙겨 쫄래쫄래 엄마를 따라 발레를 하러 갔던 나. ‘오늘은 또 어떤 동작을 배울까?’하고 설레었던 기억과 지금 내 모습이 무척 닮아있었다.


그렇게 혼자 바를 하고, 운동을 하며 천천히 몸을 끌어올렸다. 플리에, 탄듀, 바뜨망.... 어린 아기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스텝씩 내디뎠다.


23년 9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안동문화예술의전당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배리어 프리 공동 제작 공연, <해설이 있는 발레 갈라 콘서트>.


‘배리어 프리’는 Barrier(장벽)와 Free(~없이 자유로운)가 합쳐진 용어로, 장애인이나 고령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 제도적, 심리적 장벽을 허물어 모두가 함께 어울려 살기 좋은 사회를 지향하는 운동.


발레 공연을 보러 오시는 시각 장애인 분들이 무용수의 동작을 상상할 수 있도록 이어폰을 통해 음성 해설을 전달하는 것인데 그 대본 제작과 음성 해설을 내가 맡게 되었다.


‘발레 공연을 글로 풀어서 라이브로 전달한다고?’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다. 흐르는 음악을 타고 움직이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타이밍 맞춰 설명해야 할뿐더러. 무대 장치, 의상, 조명. 현재 무용수의 감정과 파트너와의 호흡까지. 글 안에 담아야 할 게 너무 많았다. 하지만 함께 작업했던 작가님께서 많은 도움을 주셨고, 총 7개의 작품 대본을 무사히 완성할 수 있었다.


<백조의 호수 中 백조 파드되>

시간: 공연 영상 기준

#1

0:03 (음악과 함께 고요하게 배경 설명) 달빛이 비치는 호숫가. 무대 왼쪽에서 발레리노가 한 팔을 곧게 펴고, 넓은 걸음으로 무대 중앙까지 이동합니다. 기품 있는 걸음, 우아한 손끝을 뽐내는 그는 왕자, 지그프리트 입니다.
0:20 (이어서 바로) 왕자는 무언가 어두운 표정으로 무대 양쪽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그의 팔도 함께 멀리 뻗어 나갑니다.
0:37 (여자 무용수 등장과 동시에) 그때, 무대 뒤편에서 눈부시게 새하얀 치마, 튜튜를 입은 발레리나가 등장합니다.
0:44 (걸어가기 직전) 한 마리의 백조처럼 가느다란 팔을 위아래로 넘실거리며 우아한 날갯짓을 선보이는 그녀는 주인공, 오데뜨입니다. 두 사람 눈이 마주칩니다. 부끄러운 듯 날갯짓하며 달아나는 오데뜨와, 그녀를 간절하게 쫓는 왕자 지그프리트.
1:01 (무대 중앙 멈출 때) 무대 중앙, 오데뜨가 아름다운 날개를 보여주듯 두 팔을 하늘 위로 뻗었다가, 부드럽게 다리를 포개며 웅크립니다.


음성 해설 대본의 일부분이다. 객석 뒤편 음향실에서 마이크를 차고, 무용수의 춤을 지켜보며 해설을 하는데 행여나 말을 더듬지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무대에서 직접 춤출 때 보다 더 떨었던 것 같다.


음성 해설은 무사히 마쳤고, 관객 분들의 반응도 좋았다. 작업 과정은 고됐지만 소중하고 뜻깊은 경험이었다. (이 공연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다뤄야겠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 나뭇잎이 붉게 물들더니 기온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바를 하는 횟수를 점차 늘렸다.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여러 동작들을 추가해 연습했다. 확실히 뼈가 좀 붙긴 한 건지 통증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긴장감을 놓진 않았다. 아팠다가 괜찮았다가, 다시 아팠다가 괜찮았다가. 지난 시간 지겹도록 날 괴롭혔던 통증이었으니까. 몸 반응 하나하나에 초집중하여 스텝을 밟았다.


운동 센터에 매일같이 출근 도장을 찍었다. 춤을 출 때, 정강이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무게 중심을 뒤로 보내 엉덩이 근육과 뒤쪽 햄스트링 근육을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운동을 도와주시는 선생님과 구슬땀을 흘리며 스쿼트와 런지를 반복했다. 운동 후, 스트레칭과 아이싱 역시 빼먹지 않고 해 주었다.


센터(바를 잡지 않고 춤추는 것) 스텝을 시작했다. 물론 점프는 뛰지 않았다. 아다지오부터, 피루엣, 그랑바뜨망까지. 오래 쉬어 잊은 감각을 깨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수시로 정강이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은 걸까.’


설렘 반 의심 반.


고개를 훌훌, 강하게 털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의심해 봤자 나만 괴로울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저 지금 내게 주어진 이 순간에만 집중하는 것이 중요했다.


낙엽은 금세 졌다. 눈이 많이 내렸다. 두꺼운 옷을 꺼내 입고 연습실과 운동 센터를 왔다 갔다 했다.


발레단 클라스에 나갔다. 발레단은 매년 12월이면 하는 <호두까기 인형> 리허설 중이었다. 나도 같이 몸을 부대끼며 돌고, 뛰고 춤추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클라스 바와 센터 스텝 ‘그랑바뜨망’까지. 점프 스텝이 시작되면 즉시 멈추고, 스트레칭과 아이싱으로 마무리했다.


발레단 형, 누나 동료들이 잘하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내자고 한 마디씩 해줬다. 고마웠다.


‘진짜 거의 다 왔다. 다음 병원 진료에서 좋은 결과 있을 거야.’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23년 12월. 내 생일 바로 다음 날.


병원을 향했다.


접수를 하고 촬영실 앞으로 갔다.


잠시 후, 간호사가 내 이름을 호명했다.


엑스레이 기계 밑에 앉아 정강이를 내밀고 자세를 잡았다. 정강이 사진은 총 4번 찍는다. 정면, 안쪽, 바깥쪽,

뒤쪽.


“오, 자세 잘 잡으시네요.”


간호사가 살짝 놀란 듯 웃음을 보였다.


‘그럼요. 이걸 그동안 몇 번을 찍었는데요.’


촬영이 끝나고 교수님 방 앞에서 대기했다. 기분 나쁜 콕콕거림은 역시나였다.


“임선우 님, 들어오실게요.”


6개월 만에 뵙는 교수님. 그리고 교수님 방 컴퓨터에 켜져 있는 엑스레이 사진.


“어?”


다 붙었다.


깔끔하게. 깨끗하게 다 붙었다.


드디어. 이제야.


“와아.... 와.”


울컥. 목이 아팠다.


너무 좋아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목이 위아래로 꽉 막혀 이상한 감탄사만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때의 감정을 어떻게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 됐네요. 천천히 복귀하셔도 됩니다.”


교수님도 웃고, 엄마도 웃고, 나도 웃었다.


행복했다.


2020년 5월 26일 연습 도중 골절.


그리고 2023년 12월 12일 완치 판정.


무려 3년 반이 걸렸다. 너무 오래 걸렸다.


핸드폰으로 말끔히 붙은 뼈 사진을 마구 찍었다.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전에 찍어뒀던 금 간 정강이와 비교를 하면서 바보처럼 헤헤 웃었다.


‘고생했네. 임선우.’


교수님 방을 나오는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칙칙하게만 보였던 병원 전경이 밝고, 따뜻하게 보였다. 부상 이후 처음으로.


*


본격적으로 복귀 준비에 들어갔다.


목표는 24년 2월에 있는 <코리아 이모션 – 정> 공연이었다. 약 3개월의 기간이 남아있었다. 그동안 점프만 안 했지, 웬만한 동작은 어느 정도 몸에 익힌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것은 점프 훈련이었다.


연습실에서 점프를 뛰기 전, 운동 센터에서 먼저 감각을 찾기로 했다. 센터에서 가벼운 러닝부터 시작했다. 확실히 완치 판정을 받아서 그런가? 깔끔하게 붙은 뼈 사진을 눈으로 확인해서 그런가? 분명 달릴 때마다 쿡쿡 찌르던 정강이 통증이 아예 없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훈련 강도를 높였다. 높은 곳에 올라가 밑으로 떨어지는 착지 훈련도 추가했다. 처음에는 계단 한 칸 정도의 낮은 높이였다면 점차 적응해 가며 두 칸, 세 칸 높이까지 끌어올렸다. 역시 두려움은 남아있었다. 높이를 올릴 때마다 잘못 떨어지게 될까 무서워 머뭇거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심리적인 문제도 내가 반드시 이겨내야 할 부분이었다.


수 십 번을 뛰었다. 수 백번을 뛰었다. 착지할 때, 엉덩이 근육과 뒷허벅지 근육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훈련했다.


새해가 밝았다.


12월 내내 호두까기 인형 공연으로 고생한 발레단은 3주간 휴가를 받았지만 그동안 지겹도록 쉬었던 난 매일 오전, 발레단 연습실을 찾았다. 사람 온기 없이 텅텅 빈 홀은 쌀쌀한 공기로 날 맞이했다. 옷을 껴입고 난방을 튼 뒤, 천천히 몸을 녹여주는 스트레칭부터 했다. 새로운 동작을 추가하며 바를 했고, 센터 스텝도 다양하게 바꾸면서 적응시켰다.


점프를 도전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일까, 점프할 때마다 다쳤던 오른쪽 다리를 잘 쓰지 못하고, 왼쪽으로 중심이 쏠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아프지 않고 뛸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아프지만 않다면, 두려움을 떨쳐내기만 한다면 무게 중심을 찾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제 괜찮다고. 다 나았잖아. 겁먹지 마!”


크게 소리쳤다. 옆에서 누가 봤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했을 거다.


“할 수 있다고!”


질리도록 훈련했던 완벽한 착지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같은 점프 동작을 반복, 또 반복했다. 하나를 몸에 익히면 바로 다음 점프로 넘어갔다. 그런 식으로 조그맣게 폴짝 뛰는 스몰 점프부터 다리를 크게 벌려 뛰는 그랑 점프까지. 높이를 차차 올려갔다.


물론 부상 전처럼 바닥을 강하게 치고 올라가진 못했지만, 그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려야 했다.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춤추기. 내가 1순위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거 하나였다.


휴가 3주가 훌쩍 지나가버렸다. 복귀 첫 출근.


“선우! 이제 괜찮은 거지?”

“다시 춤추는 거 보기 좋다.”

“무리하지 말고 조심히 해!”


단원들과 선생님들께서 웃으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는 동료들.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에 환하게 미소로 답하고 꾸벅 인사했다.


첫날부터 정신이 없었다. 복귀작인 <코리아 이모션 / 정>은 한국인의 고유 정서인 ‘정(情)’을 아름다운 몸의 언어로 표현한 네오 클래식. 발레와 한국 무용 그리고 모던적인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융화시킨 안무와 국악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한복을 입고 추는 춤인 만큼 상체를 특별히 잘 사용해야 했다. 강할 때는 강하게, 부드러울 때는 한없이 부드럽게 상체를 이용하려면 그만큼 하체가 단단한 뿌리처럼 잘 받쳐주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연인, 부부, 부모, 자식, 친구, 형제 사이의 ‘정’을 춤에 담아야 하는데 난이도 있는 동작을 하면서 그 어려운 감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았다.


공연 연습 기간 첫 2주는 정말 힘들었다. 최선을 다해서 복귀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으로 발레단 리허설에 들어가자 성한 곳 하나 없었다. 하루는 등, 하루는 허벅지, 하루는 배. 두더지 잡기도 아니고, 한쪽이 괜찮아지면 곧바로 다른 부위에서 통증이 왔다.  왼쪽 무릎이 퉁퉁 부어올라 물이 찼고, (오른쪽 정강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왼쪽을 더 많이 사용하게 되어서 그렇다.) 꽉 조이는 슈즈를 오래간만에 오랜 시간 신고 있어서 그랬는지 양쪽 엄지발톱에 멍이 들어 급기야 죽어버렸다.


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코리아 이모션’ 이 어려운 작품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하물며 막 복귀했는데 몸 상태가 아무렇지 않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다 웃어넘길 수 있었다. 그럴 수 있던 건, 정강이가 괜찮았기 때문. 제일 중요한 오른쪽 정강이가 다행히도 괜찮았다. 그동안 고생하면서 착실하게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공연 준비 기간. 나는 ‘하루살이’였다.


실제 일기에도 그렇게 썼다.


춤을 추기 위해 오늘을 사는 하루살이.


오후 6시. 모든 리허설이 끝나면 아이싱을 하며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행복하게 춤출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했다.


잠들기 전 근육 마사지를 또 해주고, 불편한 부위에 파스도 붙여주고. 스트레칭도 하고. 철저하게 다리 관리를 하며 연습에 임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연습하고, 몸관리하고, 또 연습했더니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24년 2월 15일. 무대 리허설.


19년도 겨울 이후, 다시 서게 된 ‘유니버설 아트센터’.


의상을 입고 무대를 밟아 보는데 ‘와, 이게 얼마만이냐....’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충분히 그럴만했다. 그만큼 많이 그리웠고, 오랜 시간 바라왔으니까.


무대 감각도 많이 떨어져 있었고, 조명도 강하다 보니 리허설 도중 몇 가지 잔실수들이 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리허설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온종일 기분이 나빠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실수를 한 리허설도 마냥 좋았다.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또 한 번 고민하고, 깨닫고, 새롭게 배우게 되는 그 순간마저 행복했다. 부상이 없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감정이었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잘하려 하지 말고, 편하게.

의식하지 말고, 즐기면서.

무리하지 말고, 연습하던 대로.


-2024. 2. 15. 일기 중.


공연 당일 아침이 밝았다. 발레단에 도착해서 옷 갈아입으며 클라스를 준비하는데 엄재용 선생님을 만났다.


“임선우! 긴장했네!?”


크게 웃음을 보이시며 털털하게 말씀하시는 엄재용 선생님. 사실이었다. 그렇게 자기 전에 일기에 편하게, 즐기자면서 하자고 글을 썼는데도 막상 닥치니까 긴장감이 웅웅 맴돌았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해. 공연 생각하지 말고. 클라스 할 때는 클라스만. 밥 먹을 때는 밥 먹는 거만. 분장할 때는 분장만.”


몇 시간 뒤에 있을 공연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이었다.


현역 시절, 무릎 수술로 오랫동안 재활을 해야 하셨던 엄재용 선생님. 긴 시간 기다렸던 복귀 무대가 얼마나 떨리고, 부담이 되는지를 분명히 아시는 분이기에 내게 더욱 크게 와닿았던 말이었다.


이상하게도 엄재용 선생님과의 그 짧은 대화 이후로 싱숭생숭하던 마음이 묘하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라스를 하고.


밥을 먹고.


분장을 했다.


복귀 축하한다며 파이팅 하라는 응원 문자들을 받았다.


의상을 입고, 스프레이를 잔뜩 뿌려 머리를 고정했다.


무대로 향했다.


메인 막이 내려와 있었고, 관객 입장이 시작됐는지 막 너머로 웅성거림이 들렸다.


몸을 움직이며 땀을 내고, 몇 가지 동작을 체크했다.


발레단 동료들이 내게 와서 포옹을 해줬다.


“‘진짜’ 복귀 축하해! 이제 아프지 말고 춤추자.”


‘진짜’ 복귀.


이제야 실감이 났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목이 칼칼해졌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복귀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이 무대도 그저 나의 기나긴 춤 인생 중 하나의 공연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내 감정에 못 이겨 춤에 집중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공연이 시작됐다. 내가 출 ‘찬비가’는 세 번째 순서였다. 앞 두 작품을 무대 옆에서 지켜보면서 대기했다.


박수가 터져 나오고, 암전 되었다. 무대에서 춤추던 단원들이 퇴장했다. 이제 내가 들어갈 차례였다.


정해진 위치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반짝, 조명이 들어왔다. 환하고 따스한 빛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익숙한 음악이 흘렀다. 부채를 펼치고, 스텝을 밟았다.


사랑하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부채에 담아 춤을 추는 ‘찬비가’.


어떻게 몸을 움직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음악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고 있었다.


한때 너무 아파서 춤을 그만두고 싶어 했던 내가, 다시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부채를 촥, 펼치며 마지막 포즈를 했고. 박수와 환호성이 귀를 파고들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주저앉아 바닥만 바라보았다.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안 울려고 했는데, 울고 싶지 않았는데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사람들이 놀라면서 다가왔다. 괜찮냐고, 무슨 일이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 다시 하니까 좋아서요.”


다시 춤추니까 너무 좋았다.


다리가 부러졌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너무 아팠던 수술. 지겨웠던 재활 운동. 남들이 추는 무대를 보며 꾹 삼켜야 했던 분함과 아쉬움. 극도로 예민해져서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했던 나. 왜 안 될까, 도대체 왜 내게 이런 부상이 온 걸까, 뼈는 왜 붙지 않는 걸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온종일 괴로워했던 날.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던 밤.


3년 반이라는 그 긴 시간이 한 편의 영화처럼 촤르르 지나갔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감사해서 울었고,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무대에 섰다는 게 감격스러워서 울었다.


그렇게 손에 얼굴을 푹 파묻고 훌쩍이는데, 친한 외국인 동료 ‘이고르’가 나를 툭 치며 말했다.


“야. 아직 공연 안 끝났어. 그쯤하고 준비해!”


울다가, 웃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지. 그만 울고 일어나자.


옷을 갈아입고, 다음 작품을 준비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남은 공연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었다.


*


공연을 마치고 고수리 작가님을 뵈었다. 내 첫 복귀 무대에 작가님을 꼭 초대하고 싶었는데 마침 작가님께서 일정이 맞으셔서 만나 뵐 수 있게 되었다. 22년 10월,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뵌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을 찍고, 선물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의 책 ‘밤의 사색’과 작가님의 편지. 그리고 ‘노란 프리지아’였다.


노란 프리지아의 꽃말은 ‘당신의 시작을 응원합니다’라고 하셨다.


‘아름답게 꿈을 꾸다가 다시 밤이 찾아온다 해도 두려워 말기를. 선우답게 빛나요. 언제 어디서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가님이 주신 편지 중에서)


노란 프리지아는 예쁜 꽃병에 담았고, 작가님의 편지는 일기장에 소중히 붙여두었다.


*


*


쓴 글을 쭉 읽어보았다. 잘 썼는지 모르겠다. 사실 잘 썼는지 못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내가 잠시 한 걸음 물러나 머물렀던 긴 시간을 기록하고 싶었다. 일기에도 매일 쓰긴 했지만, 이렇게 차분하게 글로 풀어보니 더 정리가 된 기분이다.


복귀 이후로 벌써 3개월이 훌쩍 넘었다.


내게 칭찬 한번 해주고 싶다. 잘 버텨왔다고, 수고 많았다고.


나름 현명하게 보낸 것 같다.


수영도 배웠고, 운전면허도 땄고, 웹소설 공부도 하는 중이고. 안무도 해봤고, ‘배리어 프리’라는 의미 있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고.


만점은 아니더라도 합격선 정도는 충분히 통과하지 않았을까.


 나를 덮친 외적인 운명이, 모두에게 그렇듯 피할 수 없고 신에게 달린 일이라면 나의 내적인 운명은 나만의 고유한 작품이었다. 그것의 달콤함도 쓸쓸함도 오로지 내 책임이다.

-헤르만 헤세, <밤의 사색>.


나는 아직도 하루살이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달라지는 몸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리허설을 열심히 한 만큼 몸관리에도 시간과 정성을 쏟는다. 어쨌거나 이젠 더 이상 아프지 말고 춤추는 게 먼저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고, 또 쌓이면 언젠가는 더 큰 무대에서, 더 넓은 세상에서 춤을 출 수 있겠지.


춤을 추든, 글을 쓰든. 매 순간 빛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두운 밤이 다시 드리우더라도 두려워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도 단단히 견뎌준 몸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다가올 내일의 춤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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