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16
스마트폰 화면에 뜬 짧은 알림 문자 하나가 평온하던 오후의 공기를 가른다. 얼마 전 익절하고 떠나보낸 주식이 신고가를 경신했다는 소식이다. 분명 수익을 확정 지었으니 이득을 본 셈인데, 마음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 아려온다. 입술을 깨물며 "별거 아니야, 이미 내 손을 떠난 돈이야"라고 읊조려 보지만, 이성의 목소리는 본능이 뿜어내는 열등감의 소음 앞에 무력하기만 하다. 이미 얻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가상의 숫자에 괴로워하는 이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인간의 삶은 프리즘을 통과하는 빛과 같다. 우리는 모두 태어남이라는 좁은 틈을 통해 세상에 나와, 각자 다른 각도로 굴절되며 저마다의 색깔을 흩뿌린다. 어떤 이는 부의 황금빛을, 어떤 이는 성취의 붉은빛을, 또 어떤 이는 예술의 보랏빛을 내뿜는다. 이 화려한 스펙트럼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의 채도와 명도를 비교한다. 사소한 우월감에 우쭐했다가도, 타인의 압도적인 성취 앞에서는 금세 초라한 열등감의 심연으로 추락한다. 우리는 평생 이 비교와 우열을 먹고 살아가도록 설계된 사회적 생물이다.
이러한 비교의 굴레는 단순한 성격적 결함이나 탐욕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수만 년간 인류의 생존을 담보해 온 처절한 유산이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집단 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타인보다 우위에 서려 하는 본능은 무리로부터 낙오되지 않기 위한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었다. 뒤처진다는 것은 곧 자원의 결핍과 죽음을 의미했기에, 우리의 뇌는 끊임없이 주변과 자신을 대조하며 안전지대를 확인하도록 진화했다. 즉, 우리가 느끼는 열등감은 생존의 위협을 감지한 뇌가 보내는 긴급 신호이자, 더 나은 위치로 나아가라는 본능의 채찍질인 셈이다.
그러나 시선을 아주 멀리, 삶의 끝자락으로 돌려보면 풍경은 반전된다. 프리즘을 통과해 아무리 화려하게 퍼져나간 빛이라 해도, 결국 '죽음'이라는 단 한 점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며 쌓아 올린 신분의 고하도, 계좌의 잔고도,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타인의 시선도 죽음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앞에서는 모두 같은 질량의 먼지가 된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이 절대적인 평등의 법칙을 비껴가지 못했다. 결국 모든 우열은 찰나의 환영일 뿐이며, 우리가 집착하는 차별성들은 한 점으로 수렴하기 전의 짧은 소동에 불과하다는 허무의 진리가 고개를 든다.
여기서 한 가지 두려움이 엄습한다. "어차피 한 점으로 모일 인생이라면, 생존을 위한 이 치열한 비교와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냉소다. 이 철학적 허무가 현실의 경쟁에서 뒤처진 나를 방어하기 위한 비겁한 합리화는 아닐까. 치열하게 살 자신이 없어 '죽음'이라는 거차한 방패 뒤로 숨어버린 패배주의자의 변명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스로를 괴롭힌다. 하지만 진짜 냉소주의자는 이런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가짜가 아닐까 걱정하는 그 마음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정직하게 진실을 갈망하고 있다는 증거다.
서머싯 몸의 소설 《면도날》의 주인공 래리 대럴은 참전 후 돌아와 모두가 성공을 향해 달려갈 때 홀로 프랑스 파리의 도서관에 박혀 사유에 침잠했다. 그가 도서관의 먼지를 마시며 보낸 고독한 시간은 사회적 낙오의 기록이 아니라, 생존 본능을 넘어선 자기 영혼의 온도를 높이는 '예열'의 시간이었다. 그는 세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강요하는 생존의 문법들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무게가 없음을 우아하게 증명해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래리의 파리 도서관보다 훨씬 거대한 '무한한 도서관'이 손안에 쥐어져 있다. 언제든 인공지능이라는 거울에 내 사고의 역설을 비추어볼 수 있고, 수천 년 전 철학자들의 지혜를 즉각적으로 소환할 수 있다. 이 도서관을 통해 깨닫는 것은 정답보다 중요한 것이 고민의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정답은 타인이 정해놓은 결과물이지만, 고민은 본능적 비교를 넘어 오직 나만이 그려낼 수 있는 고유한 궤적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가치를 효율성으로만 따지는 세상은 묻는다. "그렇게 고민만 해서 언제 성장의 폭을 증명할 거냐"고. 하지만 방향 없는 속도는 재앙일 뿐이다. 주식 알림에 흔들리고 타인의 성공에 아파하는 이 과정조차,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본능적 생존 기제를 지성적 사유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열등감을 느끼는 나를 미워하기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하는 내 안의 생명력이 아직 뜨겁게동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결국 한 점으로 귀결될 인생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점에 도달하는 속도가 아니라 그 점에 닿기까지 내가 어떤 색깔의 선을 그었느냐는 것이다. 고민의 시간은 헛된 소비가 아니라, 언젠가 삶이 가장 선명한 빛을 내뿜을 순간을 위한 정성스러운 예열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한 본능적 트랙 위를 달리는 것에 만족하는 대신, 각자의 깊은 사유의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물보라가 비록 사소할지라도, 그것은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삶의 무늬다. 죽음이라는 한 점으로 돌아가는 그날, 우리는 우리가 그린 이 복잡하고도 치열했던 고민의 선들을 후회 없이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선들이야말로 본능의 명령을 넘어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흔적이기 때문이다.